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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겡끼데스까?

‘찐구’에게

by 임희정

이젠 거의 완연한 겨울이다. 여름에 받은 너의 편지에 한계절이 지나가고 나서야 느린 답장을 쓴다. 너에게 답장을, 글을 계속 쓰고 싶었지만, 삶에 치이고 마음이 난장판이고 몸은 축나고. 무엇보다 어둡고 무겁고 엉켜있는 내 생각들이 나를 공격하는 날들 속에 쓰기는 불가능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가만히 앉아 내 생각을 정리하고 정돈하는 일인데 그게 가장 어려웠다. 그래도 30도가 넘은 뜨거운 햇볕을 지나 영하 1도의 차가운 공기의 계절로 접어드니 이렇게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빈문서를 열 수 있게 됐어. 새하얀 빈문서1 이 까만 활자들로 한 줄 한 줄채워지고 마지막 제목을 달고나면 개운하고 기쁠 걸 알아. 그래서 쓴다 다시 또.


나는 자주 너와 함께 갔던 삿포로의 날들을 생각하곤 해.그곳은 태어나 처음 본 가장 하얗고 하얀 나라였어. 눈도 나라마다 다르게 내리는 걸까. 어쩜 이렇게 뽀얗고 새하얗게 쌓여있을까. 태어나 매해 겨울마다 봤던 눈이었을 텐데도, 홋카이도의 오타루와 비에이의 눈은 너무나 시허옇고 신기로워서 나는 그곳에서 그 눈을 맞고 그 눈에 누워보며 마냥 신이 났지. 가장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여서 더 그랬을 거야.





그 눈에 누워보며 마냥 신이 났지




처음으로 같이 간 해외여행에서 우린 뭐든 다 오케이였다. 내가 핀을 꽂아 온 구글맵의 라멘집과 네가 핀을 꽂아 온 카페도 다 오케이였고, 그냥 마냥 걷다 ‘여기 갈까?’를 외쳐도 오케이였지. 그러다 각자 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땐 쿨하게 빠이빠이를 하고 저마다 각기 시간을 보내고 만나는 것도 오케이였다. 심지어는 호텔에 돌아와서도 너는 욕조에서 샤워를, 나는 대욕장에 가서 각자 목욕을 하고 젖은 머리 휘날리며 다시 만나는 것도 오케이였다. 나는 목욕을 마치고 휴게실 앞에 놓여있던 ‘서비스’라고 적힌 아이스크림 통에서 작고 귀여운 아이스바 두 개를 들고 와 너에게 건넸지. 그 달고 시원한 아이스바를 각자 입에 물고 내일은 어디 갈지 얘기 나누던 그 밤은 가장 노곤하고 달달하고 충만한 밤이었다.


나는 이 모든 오케이가 우리가 서로에게 보내는 호의이자 애정임을 안다. 큰 틀 안에서 삶의 궤도와 취향과 기호가 비슷한 우리가 갖게 된 서로에 대한 신뢰이자 존중임을 안다. 이 관계가 얼마나 깊고 소중한지 아주 잘 안다. (그래서 그냥 친구라는 말로는 부족한데 뭐라고 할까‘찐’구? 찐구야~~ 허허)











요즘 나는 마음공부를 하며 삶이 그저 나를 잘 통과해 지나갈 수 있도록 내가 무언가를 막거나 움켜쥐거나 붙들지 않도록 노력해. 그동안 너무 많은 우울과 고통을 거머잡고 딱딱하고 시커먼 마음으로 살아온 시간들이 너무 길었어. 나는 슬픈 과거의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자고, 그렇게 살아낸 나를 대견해하며 이제 생존이 아닌 현존하며 사는 삶을 잘 살아보려 해. 지금을 느끼고 알아채고 감사해 하면서.


내가 가장 슬플 때도 내가 가장 기쁠 때도 항상 찾게 되는 건 너더라. 넌 내 슬픔은 담담히 받아주고 내 기쁨은 격하게 축하해 주잖아. 나는 너의 그 높낮이가 너무 좋다. 덕분에 내 슬픔은 희석되고 기쁨은 증폭 돼. 다행이고 고마운 일이야. 나에게 그런 네가 있어서.




다행이고 고마운 일이야. 나에게 그런 네가 있어서.





앞으로도 계속 각자의 시간을 살다 뜨문뜨문 만나 풍경이 좋은 곳을 천천히 걷고, 맛집을 찾아가 음식이 나오면 기대하며 물개박수를 치고, 중간중간 서로의 날들을 주고 받으며, 그렇게 서로의 ‘찐구’로 잘 살자.

그리고 다음엔 더 멀리, 더 낯선 곳으로 함께 떠나자. 친구야.


그 기대가 우리를 또 살게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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