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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니누 Sep 02. 2020

"특권 (셰이머스 라만 칸)"


컬럼비아 대학의 사회학과 교수인 셰이머스 라만 칸은 전통적인 민족지적 방법(참여관찰)을 활용해, 자신의 모교인 미국 명문 사립학교 세인트폴에서 신엘리트의 문화와 그들이 양성되는 과정을 읽어낸다. 그리고 미국 사회의 민주적 불평등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수행한 연구에서 특권의 편안함, 능력주의의 역설을 마주한다.

목차

:민주적 불평등 / 새로운 엘리트들 / 자기 자리 찾기 / 특권의 편안함 / 젠더와 특권의 수행 / 베오울프도 배우고 죠스도 배우고 / 결론

1장에서는 엘리트가 구체제에서 도금시대,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왔는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우리 시대 새로운 엘리트인 “신엘리트”는 구엘리트의 특징인 특권의식보다는, 어떤 상황에서도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몸에 각인된 특권을 지니고 있다. 2장의 제목인 ‘자기 자리 찾기’는 엘리트들이 그렇게 특권을 수용하는 방법을 암시한다. 세인트폴이라는 엘리트학교에서 학생들이 성장하는- ‘엘리트로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위계질서를 타고 올라가는 것이 포함된다. 그들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높은 위계를, 그리고 더 많은 경험과 성취를 맛본다. 이는 물론 자신들이 노력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 과정에서 출신 배경에 대한 자부심보다는 자기 자신의 경험이 중시된다. 경험을 통한 것만이 인정받는다. 그리고 이들은 때로는 위계를 넘나들며 높은 사람과도, 낮은 사람과도 편안하게 상호작용한다. 자기 자리를 찾는 것과, ‘가능성의 공간‘에서 앞으로 더 나아가는 일, 그리고 이것들을 모두 ‘자신이 해낸’ 결과라 믿는 것이 신엘리트가 되는 길이었다.
3장에서는, 신엘리트들에게서 구별짓기는 찾아볼 수 없었으며 편안함을 체화하는 것이 특권임을 말한다. 이 과정에서 ‘실천‘이 무척 중요하며 편안함을 통해 부와 권력 (혹은 특권)을 위한 노력은 자연스럽게 보여야 하는 과제가 수행된다. 한편, 인종적 차이는 세인트폴의 폴리들이 특권을 체화하고 세인트폴의 문법을 익히는 과정에서 차별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4장에서는 편안함 드러내기가 인종뿐만 아니라, 젠더에 따라서도 다르게 나타난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여학생들은 섹슈얼리티와 특권 사이에서 모순을 직면한다. 마지막으로 5장에서는, 신엘리트의 포용성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신엘리트는 고급문화에서부터 하층문화까지를 모두 섭렵하는 잡식성 소비를 새로운 표식으로 지니고 있었다. 앎이 민주화되면서 이제는 엘리트에게 중요한 것은 실제로 아는 것보다는 각종 지식을 무심하게 다루는 재주였다.


우리는 3번의 모임을 통해 책을 바탕으로 서로의 생각을 깊이 있게 나눠보는 시간을 가졌다. 한국에서 강조되는 능력과 시험에 대한 환상, 공정한 기회, 특권을 가지게 되면 부딪히게 되는 한계에 대해서도 이야기했고 능력주의와 능력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능력 자체의 형성 과정에 있어서의 불평등, 혹은 능력을 평가하는 것 자체의 공정함 혹은 그 방법이 무엇이 되어야 하냐를 묻기도 했다. 각자가 읽어낸 텍스트는 질적으로 다를 것이고, 무게중심을 두고 읽은 부분 또한 다를 것이지만 우리의 고민들은 비슷했던 것 같다.  


저자는 이 민족지적 연구를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이 책의 결론의 핵심은 엘리트 학교의 구성원이 다양해졌다고 해서, 누구든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게 변했다고 해서 평등해진 것은 아니란 것이다. 다양성과 평등을 구분해야 한다. 그리고 사회는 개방적이어도(=열린 사회라 하더라도) 불평등할 수 있다.
쉽게 말해 부유한 사람들은 세인트폴과 같은 교육 기회를 산다. 그리고 구매된 이점은 이러한 이점을 자연화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엘리트 교육을 통해 학생들은 값비싼 경험을 체화해버렸기 때문이다. 엘리트학교는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부와 권력을 쥐게 되었다고 믿는 엘리트를 ‘재생산’ 한다. 능력주의의 발흥과 아메리칸 드림의 공식, 각종 인권 운동으로 중요하게 떠오른 ‘개인적‘인 특성, ‘개인’의 능력은 역설을 낳아버렸다. 날이 갈수록 사회는 집단주의보다는 개인주의를 향해 가고 있는데, 개인에 대한 강조는 자꾸만 사회적 맥락이나 (귀속적 특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조건들을 망각하게 만든다. 그런 와중에 집단주의 정치는 종말되어버렸고, 사회적 범주로서의 계급의 부재, 계급이라는 집단 정체성의 결여의 문제는 정치적 연대를 막아버린다. 그래서 저자는 집단주의 정치, 소외된 이들이 숫자와 조직화의 힘을 빌리는 방법을 해결의 실마리로 여기고 있는 듯하다. 개인의 승리는 신화일 뿐이다. 개인의 능력과 자질을 강조하면 할수록, 그 토양에서 자랄 수 있는 엘리트들만 더욱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할 뿐이지 세계는 평등을 향해 나아갈 수 없다.

능력주의는 자칫하면 불평등의 문제를 푸는 열쇠처럼 보이지만, 실은 불평등한 사회체계를 유지시키고 심지어는 은폐하고 있었다. 정말로, 누구나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성공한 사람들은 내가 노력했기 때문에, 나의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성취를 이룰 수 있었다고 믿고, 때로는 그 믿음을 발화하지만 인생의 기회는 상당 부분 부모의 부와 사회적 지위 등 가정배경에 의해 결정된다. 기회가 다른데 어떻게 똑같은 결과를 누릴 수 있겠는가? 계급적 차이는 그래서 중요하다. 세상은 개방되고 성적, 인종적인 다양성은 증가했지만 여전히 세상은 불평등한 이유의 핵심은 계급에 있기 때문이다.

능력주의는 오히려 계급에 따른 기회의 차이를 보지 못하게 만들고 오로지 결과에만 집중하게 만든다. 그리고 결과가 만들어낸 불평등과 그 결과에 따른 차별을 당연시하게 만든다. 누군가는 능력이 없으니까, 좋은 직장을 가질 수 없고 노력하지 않았으니까 가난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말이다.  신엘리트들 자신은 이미 성 안에 들어온 사람들인데, 그 안에서 사다리를 타고 첨탑까지 올라가는 것이 세인트폴 학교의 교과과정을 마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노력하고 경쟁하기 때문에 자신이 성 안에 들어온 것이 마치 자신의 능력과 노력의 결과라고 믿는 것 같다. 출발조건이 달랐는데, 자신들은 노력을 통해 성공에 필요한 자질과 능력을 갖추었다고 믿는 셈이다. 그리고는 성 밖과 안을 이어주는 성곽에는 사다리가 있어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데 ‘너네들은 왜 못들어오느냐’고 묻고 있는 듯하다.
능력주의의 최대 모순은 여기에 있다. 누군가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지 못하는 것이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문제가 되게끔 하는 것. 불평등을 전부 밑바닥에 있는 이들의 편협함 탓으로, 그리고 각자의 행위의 산물로 설명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사회학자 조은의 빈곤에 대한 참여관찰 연구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그는 자신의 저서 『사당동 더하기 25』 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빈곤문화(절제 없음, 알코올 중독, 게으름, 성적 문란 등)가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을 지속하는 요인이 아니라 “가난의 구조적 조건”이 있을 뿐이라며 개인들의 삶의 양식으로 보이는 빈곤문화는 오히려 가난의 결과라고 말한다. 그들의 가난은 세계화나 금융 자본주의, 도시 공간의 자본주의적 재편 등의 구조적인 조건에 따른 것이었고, 빈곤문화보다는 그들의 빈곤이, 빈곤의 재생산 구조가 삶의 조건이 되고 있음을 밝혀냈다. 그들이 열심히 살지 않아서 낮은 곳에 있는게 아니라는 말이다.  “가난의 조건에 대한 보이지 않는 구조를 이들 가족이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체현하고 있다.” (조은; 2012)  


한편, 신엘리트들은 어떤 방식으로 불평등을 은폐시키는 장본인이 되고 있으며 이들 계층이 수용하는 특권은 어떤 모습일까. 일반적으로, 우리는 남을 잘 배려하고 예의바른 사람들을 일컫어 배려가 ‘몸에 배어있다’는 말을 하곤 한다. 세인트폴의 학생들에게는 편안함이 ‘몸에 배어‘있었다. 특권은 엘리트들에게 체화되어 그것이 마치 그들의 재능인냥, 역량인냥 보이게 되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차별점들이 자연화되면서 불평등은 마치 개인의 특징-자신의 노력이나 선택-때문인 것으로 보여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특권을 체화한 자들은 자신이 특권을 누리고 있는지조차 모른다(혹은 무시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열심히 얻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더라도, 그렇게 보인다.

그래서 이 신체적 표식은 앞서 언급한 조은의 연구 대상 (사당동의 빈민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문화와 사회의 구조가 몸에 깊이 박혀있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남들이 인정을 해주기에, 체화된 특권은 일종의 자본이 된다. 그에 반해 가난은, 자본이 되기 보다는 극복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스스로 긍정하기 어려운 정체성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차이는 계속해서 불평등의 구조적 문제보다는 개인의 재능과 노력에 집중하게 만드는 악순환을 낳는 것이 아닐까. "공정함"의 트릭에 갇히지 말고, 불평등을 직시하는 노력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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