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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진한 Aug 28. 2022

글 치는 사람

수업 잡담, 하나

국어사전에서 하나의 표제어 아래 1), 2), 3),… 하는 식으로 뜻이 여러 개 있을 때 그러한 단어를 ‘다의어(多義語)’라 한다. 이와 유사해 보이지만, 소리는 같되 뜻의 유사성이 없어 별개의 표제어로 사전에 실린 단어들은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라 부른다. 가령 국어사전에서 ‘손’이라는 단어를 찾았을 때 “1) 사람의 팔목 끝에 달린 부분, 2) 손끝의 다섯 개로 갈라진 부분, 3) 일을 하는 사람…” 등의 뜻이 이어지므로 ‘손’은 다의어이다. 그런데 사전에 또 다른 ‘손’이 있어 이 단어가 “다른 곳에서 찾아온 사람”이란 뜻을 가져 앞의 ‘손’과는 뜻의 유사성이 인정되지 않는다면 이 두 종류의 ‘손’은 동음이의어이다. 고등학생이라면 대개 알고 있을 내용이다.     


그런데 몇 해 전 수능에 흥미로운 문제가 하나 나왔다. 문제가 어렵지 않아 정답률은 높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긁다’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 그 의미를 제시해 놓고 이런저런 문법 개념을 묻는 문제였다. 당연히 여기서 그 문제 풀이를 하려는 것은 아닌데, 다의어 ‘긁다’의 사전적 의미가 하나 추가되었다는 내용이 제시되었다.     


10) 물건 따위를 구매할 때 카드로 결제하다. 

¶ 이번 달에는 카드를 너무 긁어서 청구서 보기가 무섭다.      


다시 말해, 카드를 결제하면서 “내가 긁을게.”하고 말할 때의 ‘긁다’의 의미가 공식적으로 사전에 올랐다는 것(2014년)이다.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카드로 결제한다”는 원래 사전에 없는 ‘긁다’의 의미였다는 뜻이 되는데 이는 언어의 의미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언어의 의미는 물론 소리나 형태까지도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 이러한 언어의 특성을 언어의 역사성이라 하고, 역시 고등학교에서 배운다. 우리가 세종이 만든 훈민정음을 사용하고 한글날을 기린다지만, 15세기의 국어를 이해하는 것보다 지금 영어를 해석하는 게 더 쉽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어쨌든 이 문제를 설명하는데 고1 학생이 질문을 던졌고 같은 질문을 정확히 두 번 받아 봤다.     


“선생님, 이거 맞긴 했는데…. 근데 왜 ‘카드로 결제하다’가 ‘긁다’의 의미로 추가됐을까요?”     


오, 이런! 공부를 못하는 학생도 아니어서, 왜 이런 질문이 나왔을까를 생각하니 이유는 단순했다. 요즘 어린 학생들은 카드를 단말기에 긁는 모습을 본 적이 없거나, 봤어도 흔한 장면이 아니다 보니 그 의미가 추가된 이유를 곧바로 연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 어린 시절엔 부모가 결제를 했을 것이고, 이젠 대부분 IC 카드이다 보니, 오류가 있지 않다면 카드를 ‘긁어본’ 적이 없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쨌든 이유를 말해 주면, 그래도 긁는 걸 본 적은 있었다는 듯 “아하~” 한다. 그런데 이어지는 질문과 이야기.    

 

“선생님, 그러면 ‘꽂다’도 ‘카드로 결제하다’의 의미로 추가될 수 있을까요? 야, 오늘은 내가 꽂을게!ㅋㅋ”

“야, 삼성페이도 있잖아. 야야, 오늘은 내가 갖다 댈게!”

“요샌 바코드로도 결제하는데 그건 뭐라고 하려나.”     


삼천포로 빠지는 것 같기도 하지만, 기상천외한 이야기들을 듣고 있다 보면 아이들의 발랄함에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고 정말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기에, 말도 안 된다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선생님, 그러면 ‘내가 쏠게!’ 할 때의 ‘쏘다’도 사전에 있나요?”     


정말 널리 사용하는 단어이지만 “사 주다”는 뜻의 ‘쏘다’도 아직 정식 등재는 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국립국어원에서 만든 개방형 국어사전인 <우리말샘>에 올라 있기는 한데, “여럿이 함께 먹은 음식 따위의 값을 치르다.”로만 풀이되어 있다. 하지만 이 뜻풀이대로라면 나중에 N분의 1로 돌려받을 것을 염두에 두고 단순히 먼저 값을 치른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어, “오늘은 내가 쏠게!”라는 말 속에 들어 있는 ‘쏘다’의 의미를 충분히 담고 있지 못하다. 아마 정식 등재가 되면 뜻이 더 다듬어지리라 생각한다.   

  

아이들에게 ‘신문’이나 ‘인구’를 발음해 보라고 하면, 절반 이상은 ‘심문’, ‘잉구’로 발음하고도 틀린 줄 모른다. 정확히 발음한 아이들마저 왜 자기들만 맞았는지 몰라 어리둥절해 할 정도로,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발음이다. ‘심문’, ‘잉구’가 틀린 발음이냐고 반문하는 경우도 있을 텐데, 적어도 ‘아직은’ 표준 발음이 아니다. 글자 그대로 ‘신문’, ‘인구’로 발음해야 한다. ‘신문’을 ‘심문’으로 발음하는 것을 양순음화, ‘인구’를 ‘잉구’로 발음하는 것을 연구개음화라 부르는데, ‘아직은’ 표준 발음이 아닌 이 현상은 워낙 보편적인지라 머지 않아 표준 발음으로 인정되리라 생각한다. ‘자장면’만 표준어였다가 ‘짜장면’도 표준어로 인정된 사실, ‘김밥’의 표준 발음이 원래는 ‘김밥’ 하나였다가 ‘김빱’도 인정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  

   

“글을 쓴다”고 할 때의 ‘쓰다’ 역시 다의어인데, “1) 붓, 펜, 연필과 같이 선을 그을 수 있는 도구로 종이 따위에 획을 그어서 일정한 글자의 모양이 이루어지게 하다.”, “2) 머릿속의 생각을 종이 혹은 이와 유사한 대상 따위에 글로 나타내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요즘은 종이에 글을 쓰는 일이 확연히 줄고 있을 뿐 아니라 작가들마저도 대부분의 글을 컴퓨터로 ‘쓴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때의 컴퓨터를 2)의 ‘유사한 대상’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애초에 ‘쓰다’의 뜻풀이를 만들 때 ‘종이’의 ‘유사한 대상’으로 ‘컴퓨터의 워드 프로그램’을 생각했을지는 의문이다.


‘치다’를 살펴보아도 뭔가 부족하긴 마찬가지이다. 지금도 사전에 올라 있는 ‘치다’의 뜻 중에는 “일정한 장치를 손으로 눌러 글자를 찍거나 신호를 보내다.”가 있지만, 예문으로 “타자, 전보, 무전을 치다” 정도가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은 장치 사용에 대한 기술적 행동을 설명하는 수준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생각을 글로 나타내다”의 뜻은 아직 ‘치다’에 들어있지 않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카드로 결제하다”가 ‘긁다’의 뜻으로 이해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세종대왕도 할 수 없었을 것. 그러니 ‘꽂다’나 ‘대다’에 “결제하다”의 의미가, ‘치다’에 “머릿속의 생각을 글로 나타내다”가 덧붙지 않을 거라는 장담을 할 수는 없다. 먼 훗날 우리 딸이 아이를 낳아 그 아이가 말을 배울 때 쯤이면 이런 이야기를 나누게 될지도 모른다.      


“할아버지, 작가가 뭐야?”

“응, 글 치는 사람”


- 22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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