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용서가 시간낭비일 수 있다.
요즘 우리 주변에선 선을 넘지 않는 사람을 찾는 것이 더 힘들다.
- 우리끼린 괜찮지 않냐며 더러운 성경험 발언을 쏟아내는 임원
- 갑자기 끼어든 차에 쌍라이트+크락션+위협운전 하는 평범한 직장인
- 불친절한 알바생에게 패드립과 저주를 퍼붓는 노인
이런 극단적인 것들만이 선을 넘는 것은 아니다. 사소한 말과 행동도 있다. 우리 모두에게 각자의 기준에 따른 선이 존재하고 사회가 합의해 달리 부여한 선의 기준도 존재한다.
법관에게 요구하는 선과 불우한 청년에게 요구하는 선, 지인과 친한 친구에게 기대하는 선이 다른 것처럼.
몇 년을 알고 지낸 친구가 있었다.
꽤 친하게 서로의 집도 오며 갔고 여행도 갔고 많은 시간을 보냈었다. 어느 날 별로 친하지 않은 누군가에게 없는 사실을 지어내 험담을 한 것을 알게 됐다. 그 전에 이 친구는 회사에서 이러한 문제로 부서전배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 날부로 나는 연락을 끊었다.
물론 그 험담이 내 인생을 위협할만한 것도 아니었고 실질적 피해를 입은 것도 아니었다.
들은 이도 믿지 않을 정도의 허무맹랑한 이야기였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없는 일을 지어내서 나를 음해하는 행동 그 자체가 선을 넘은 것이었다. 이것이 그 시작이라면 크레센도처럼 될 미래가 뻔히 보였다.
시간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다.
관용과 용서, 기회의 관점에서 한 번의 실수로 재단하는 게 맞느냐는 의견도 있다. 동의한다. 사회는 용서하고 기회를 주면 된다. 일자리와 가정을 가질 기회도 주어야 한다.
그 친구도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산다는 것을 들었다. 그러니 사회가 용서하고 기회를 준 것이다.
하지만 개인은 모두를 용서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