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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oKimm Mar 02. 2021

[스몰톡] 동일본 대지진 10년

나는 지금도 가끔 일렁이는 검은색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꿈을 꾸곤 한다

2011년 3월 11일 2시가 넘은 시간 나는 신주쿠에 위치한 디자인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사무실 사람들도 잘 느끼지 못하는 아주 미세한 지진도 나는 잘 알아채는 편이었는데(예를 들면 진도 1의 지진에도 나는 잠에서 자주 깼는데 다음 날 출근해서 물어보면 누구도 깬 사람이 없었고 검색해보면 꼭 내가 깨어났던 시간에 지진 기록이 있었다) 아마도 몸이 흔들린다는 단순한 언어로 표현했던 지진에 대한 정의를 실제로 겪어보니 전혀 다른 경험이어서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던 것 같다. 아무튼 그래서 다들 나를 동물적인 감각의 소유자라고 놀려대곤 했다.


처음에는 그냥 잠깐 지나가는 2~3도 정도의 지진인가 보다 했다. 자주 있는 강도는 아니었지만 이미 겪어본 적은 있으니 잠시 그대로 있으면 멈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몸이 점점 더 심하게 흔들리고 사무실 사람들이 조금씩 동요하기 시작했다. 사장님도 대피해야 할 것 같다며 나가자고 하셨고 완전히 패닉 상태는 아니었지만 모두들 침착하게 계단을 이용해 건물 밖으로 대피했다. 그 와중에 나는 아직 혼자 앉아 있는 과장님이 걱정돼서 선뜻 뛰어나가지 못했는데 입구에서 뒤돌아 과장님을 쳐다봤을 때 과장님은 곧 떨어질 것 같은 모니터를 부여잡으며 먼저 내려가라는 말만 하셨다.

좁은 비상계단을 내려가는데 페인트 조각들이 눈 앞에 떨어졌다. 그리고 그 공간을 내려가는 와중에도 내내 흔들리고 있어서 손으로 양쪽 벽을 짚은 채 내려가야 했다. 건물 밖으로 나가니 주변 건물에서 뛰어나온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큰 지진이 나면 머리를 감싸고 책상 밑으로 들어가라는 교육을 받고 자란 일본 사람들도 이런 지진은 난생처음인 것처럼 겁에 질린 채 인도로 쏟아져 나와 있었다.


반대편 건물의 통유리가 불룩불룩 움직이며 물결을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심하게 휘어지는데도 깨지지 않는 게 신기해서 넋을 놓고 쳐다보는데 흡사 CG 효과가 들어간 영화 장면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도 종종 그 장면은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주변에는 딱히 붙잡고 서 있을만한 것이 없었다. 한참을 심하게 요동치던 땅이 잠시 조용한가 싶더니 다시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몸을 가누기가 어려워 가로수라도 붙잡고 싶었는데 눈 앞에서 파르르 흔들리는 나무들을 보니 그것들도 나를 지탱해줄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다.

하늘에 갑자기 검은 먹구름이 나타났다. 그 뒤로 거대한 파도가 밀려드는 상상을 했는데 동시에 어디든 바다와는 멀리 떨어져 있어 해일이 이곳까지 밀려들 리가 없다는 현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돌아보니 멀리에서 고층 건물 공사장의 타워크레인이 메트로놈처럼 양 옆으로 휘어지는 장면이 보였다. 부러질 듯 부러지지 않던 그 높은 크레인에는 두 명의 사람이 타고 있었다. 다행히도 크레인은 부러지지 않았고 누구도 떨어지지 않았다.

큰 지진이 잠잠해졌고 거리에 나와 있던 사람들은 약간의 겁을 먹은 채 그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큰 지진이 왔고 사람들은 아까처럼 뛰어나왔다. 내가 기억하는 큰 지진은 두 번이었다.


핸드폰이 불통이 되었다. 누구의 핸드폰도 터지지 않았다. 인터넷 연결은 그나마 괜찮은 편이어서 네이버와 야후JP 화면을 띄워놓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살펴보았다. 도쿄에서 큰 지진이 일어난 줄 알았는데 사실 이 지진은 후쿠시마를 검은 물로 뒤덮어 버렸던 1900년대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지진으로 기록된 동일본 대지진이었다.


신기하게 핸드폰은 안되면서도 인터넷 연결 상태는 괜찮았다. 핸드폰이 불통이 되니 가족이랑 친구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나 보다. 일단 동생 씨에게 메일로 아무 일 없으니 걱정 말라고 다들 좀 당황했지만 별 일은 없다고 전달했다.

전 노선의 전철 운행이 중지되었다. 집에는 어떻게 가야 하나 하고 사무실 밖을 내다보았는데 사람들이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가족들의 안부를 묻기 위해 공중전화에 길게 늘어선 줄이 낯설고 조금 무섭기까지 했다. 좀비처럼(적절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표정 없이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는데 재난영화 같았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길에 넘쳐나는데 시끄러운 소리도 없었다. 그리고 간혹 안전모를 쓰고 걸어가는 사람도 보였다.


사장님이 버스가 운행되는 곳까지 차로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사장님 차는 승용차였는데 뒷자리에 나를 포함한 대리님들까지 네 명이 탔고 앞좌석에는 다른 남자 알바생이 탔다. 도로가 진짜 꽉 막혀 있었는데 평소 30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를 2~3시간 정도 갔던 것 같다. 중간중간 전차 운행 상황을 체크했는데 거의 자정이 다 된 시간에 내가 살고 있던 동네 근처의 전철이 운행을 재개했다. 그 날 집까지 돌아가는 데에 6시간 정도가 걸렸는데 평소 전철을 타고 간다면 1시간 정도가 걸리는 거리였다.


나는 같은 회사에 다니는 대리님의 집에서 방 하나를 셰어 하고 있었다. 그때 대리님은 남자친구를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는데 전차가 운행되는 곳에서 남자친구 집에서 잔다며 방향을 달리했다. 그래서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다른 대리님과 집으로 돌아갔다. 원래대로라면 지진이 일어난 다음날 모두 함께 아타미 온천으로 놀러 가는 날이었는데 취소 수수료를 물더라도 나는 안 가겠다고 말하자마자 같이 사는 대리님이 전화로(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핸드폰이 다시 터짐) 극노했다. 어차피 오다큐 선도 움직이지 않아 취소하지 않아도 취소될 텐데.. 다른 대리님은 중간에 끼어서 어느 쪽 편도 들지 않았지만 사실 나는 이 상황에 바다가 코 앞인 아타미까지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가장 컸다. 결국 다음날 신주쿠까지 나가서 오다큐선 티켓을 환불받자고 합의하고 이 이야기는 마무리가 되었다. 아, 물론 숙박도 무료 취소됐다. 오다큐선 운행 중지가 다음날까지 이어졌으므로.

집에 돌아가니 욕실에 있던 샴푸들이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것 말고는 크게 부서지거나 망가진 곳은 없었다. 나중에 사장님한테 들으니 사장님 집은 고층이어서 변기 안에 고여있던 물이 밖으로 흘러나와 있었다는 거다. 아 진짜 고층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장님이 나 다음으로 가장 늦게 사무실을 빠져나왔는데 고베 대지진을 겪었다고 했다. 어쩐지 그에게서 약간의 여유가 느껴지더라니... 진열장에 둔 건프라들이 죄다 쓰러졌다며 정리 어떻게 하냐고 한숨만 푹푹 쉬었더랬다.


의외로 문제는 11일 밤이었다. 튼튼하다는 콘크리트 아파트여서 무너질 걱정은 없었는데 잠을 자는 내내 여진에 시달려야 했다. 몸이 흔들려서 깬 게 아니라 건물이 흔들리면서 내는 소리에 잠이 깼다. 그리고 함께 울리는 재난경보알람... 세네 번 정도 크게 흔들려서 알람이 울렸고 그 외에 셀 수도 없이 작은 여진들이 지속적으로 있었다. 여진이 이렇게 심하다는 것도 모른 채 혼자 불안하게 밤을 보냈는데 다음날도 대리님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도저히 혼자 잘 수가 없어 다른 동에 사는 대리님 부부 집에서 한 이틀 정도 잤던 것 같다.


귀국을 두 달 정도 앞둔 시점에 이런 일을 겪으니 남은 두 달을 도쿄에서 더 지내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장님이 비자 줄 테니 계속 지내는 건 어떠냐고 물어보셨었는데 그에 대해서는 이미 거절한 상황이었다. 나의 해외 생활 경험은 이 일 년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동거인이 집에 잘 돌아오지 않는 이 시점에 나 혼자 이 여진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일정을 앞당기기로 결정하고 지진이 일어난 5일 후에 나는 귀국을 했다.


사무실에서 하던 일을 정리하고 일본 생활을 조금이나마 마무리할 시간은 두었다. 실제로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던 다른 또래 친구는 엄마랑 함께 일본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지진 다음날부터 연락이 아예 안 되고 출근도 하지 않았다. 엄청 성실하던 친구인데 모두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음. 사장님한테 양해를 구하고 귀국하는 날까지 근무하기로 협의가 되었다.

며칠이 지나도 여진은 계속되었는데 혹시라도 큰 지진이 더 나면 한국행은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전철 운행은 불안정해서 귀국일 전날 하네다 공항에서 노숙을 했다. 나 말고도 공항에서 노숙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다행히 친구가 발권 업무를 하고 있어서 남아 있는 티켓 중 가장 빨리 귀국할 수 있는 항공편을 끊어주었다.

예정보다 일찍 귀국하게 되었는데도 사장님은 택시라도 타고 공항에 가라며 오천 엔을 쥐어주셨다. 구직 활동을 하는 동안 정말 스트레스가 많았는데 거둬준 것도 감사한 마당에 돌아가는 차비까지 챙겨주시니 죄송스러운 마음이 컸다. 내가 구직할 때만 해도 손글씨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써야 했는데 한 달 동안 새 볼펜을 두 자루나 다 쓰는 대기록을 세웠다. 외국인으로 일본에서 면접을 보러 다녔던 그 경험들은 재미있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힘들었던 기억이 더 큰 것 같다.


김포행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서울의 불빛들이 얼마나 큰 위안을 주었는지 모른다. 일본은 대체적으로 해가 지면 골목길에 인적이 드물고 어두운데 아빠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골목까지도 휘황찬란한 각종 간판들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 유치한 불빛들이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하네다 공항에서조차 4도의 여진을 두 번이나 겪어야 했는데 다행히도 그 지진이 마지막 경험이 되었다.

귀국하고는 이상하게 병적으로 지진 관련 기사들을 찾아보았다. 내가 있던 곳에서 일어난 일들이었음에도 마치 다른 세계의 이야기 같았고 반대로 또 내 이야기 같았다. 14층이었던 용인 집에서 나는 자주 건물이 흔들리는 것 같은 경험을 했고 몇 번이나 엄마한테 지금 지진 난 거 아니냐고 물어보았다.

 

그때부터 피곤하거나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으면 검은 파도가 밀려드는 꿈을 꾼다. 그 안에서 나는 늘 검은 물속에서 허우적대거나 끊임없이 높은 곳으로 도망친다. 블로그에도 기록해두지 않았던 그때의 이야기들을 이렇게나 자세히 기억하는 걸 보면 어쩌면 그 날의 기억은 영원히 바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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