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소개로 김은비 작가의 사랑하고도 불행한 책을 읽었다.
63페이지에서 그녀는,
20대 초중반 무렵에는 애매한 사랑 관계에 놓였다는 사실을
곧 죽어도 인정하기 싫어했다.
주변의 여자 친구들 또한 그랬다.
왜냐하면 대부분 관계에 정의를 내리려고 하지 않는 것은 남자 측이었기 때문이다.
그 말은, 상대가 나에게 그만큼의 애정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사실은 내가 매력이 없는 여자라는 말과도 같았다.
고로 곧 죽어도 인정하기가 싫었던 것이다.
살다 보니 발에 차이는 게 그런 남자였다.
사실 우리가 노는 바닥이 그랬고, 우리도 누군가에게는
줄 듯 말 듯 애매한 줄다리기만 해대는 썅년이었을 것이다.
인정하기로 했다.
우리는 fuck boy를 좋아하고 그들의 니즈를 우리가 충족시켜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지만 먹이사슬의 구조가 그러하다.
됐다 그래!
콧방귀를 뀌었지만 나도 결국 그 바닥 남자를 짝사랑을 하게 되었다.
꽤나 최근의 일이었다. 5개월 정도 그 남자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었다.
때로는 잔잔하다가도 때로는 배가 난파될 정도의 파도가 일었다.
때때로 그와 싸우기도 했다.
그도 내가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내가 소문을 내고 다녔다.
그를 짝사랑한다는 사실이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그를 좋아하는 감정이 그에게 어떤 상호작용을 바라면서
때때로 몹시 괴롭기도 했지만,
스스로에게 '짝사랑'이라는 사실을 주입시키며 달래고는 했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다.
에둘러 '짝사랑'이라고 말해놓고는
그가 떠먹여 주는 음식의 첫 입들을 받아먹으며,
돌아누운 나를 두 팔로 꼭 안아주는 따뜻함에 익숙해지고,
나의 옷매무새를 신경 쓰는 그의 시선들이 쌓여서,
그가 나에게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없었어도
나는 그에게서 진한 애정을 느꼈다.
그에게 어떤 사랑의 트라우마가 있었든 간에,
어떤 현실적인 상황이 닥쳐있든 간에,
그의 다정함이 얼마나 방대했든 간에
그가 나에게 했던 것은
결코 사랑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