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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셈케이 Apr 15. 2024

02 안녕 인턴씨?

자네 좋은 디자이너가 되고싶은가?



 반야심경을 들으며 겨우 출근 했던 날, 자리에 엉덩이를 대기도 전에 실장이 나를 불렀다. 며칠 뒤 대학생 인턴이 출근하는데 그래픽쪽으로 근무하고 싶다는 니즈에 맞춰 내가 그의 선임이 되었다는 피로한 정보를 듣고야 말았다. 채용연계형도 아닌 그저 대학생체험형 인턴, 쉽게 말해 '회사가 뭡니까?'를 살짝쿵 배우고 홀연히 떠나는 나에게 그 어떤 유의미함도 남지 않는 인턴을 내게 맡겨버렸다. 그가 근무하던 3개월 동안 단 한 번도 그의 업무에 관해 그 누구도 묻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업무를 정리한 파일을 보고하고자 했으나 '셈케이가 알아서 잘하겠지!'라는 믿음을 가장한 무관심에 더 깊숙이 무게를 실어주었다. 눈물 나게 고맙게시리. 허허.


 그의 첫 출근 날, 그는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평소 좋아하던 브랜드라는 말과 함께 회사생활, 즉 진정한 디자이너의 삶에 가볍게나마 발을 담가보는 순간에 흡족해 보였다. 하물며 4년 동안 과제를 해내며 이 날만을 얼마나 고대했겠는가. 잘 알지.



 테스트 형식으로 마주한 그의 디자인 실력을 솔직히 아주 많이 부족했다. 당연한 결과다. 그러나 신입들의 대부분은 그 사실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한다. 몇 년간 꽤 그럴싸한 디자인 수업을 들으며 나만의 그림체를 가진 디자이너로 성장해 왔다 생각하기에 자기 객관화가 부족하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당장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회사는 디자인을 '잘'하는 디자이너를 원하는 듯 보이지만 회사가 원하는 바를 '잘' 구현해 주는 디자이너를 더 높게 평가한다. 실제로 아이디어적인 부분이 다소 부족해도 눈치가 빠르면 나쁘지 않은 결과물을 낸다. 뭐가 다르냐 반문한다면 쉽다. 나는 하트패턴이 너무 마음에 들고 기똥차게 잘 뽑아냈다싶어도 이전 시즌에 비슷한 패턴으로 패배를 맛봤다면 컨펌이 시작하기도 전에 팀장선에서 하트패턴은 공중분해되고 말 것이다. 결국 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오래 연명하기 위해서는 나만의 색은 무기 삼아 숨겨두고 그들의 철학에 빠르게 스며드는 법을 익히는 것이 좋다. 그런 누적들이 언젠가 나의 무기를 내밀었을 때 가치 있게 비친다. 무능하게 눈치만 보라는 소리가 아니다. 진짜 제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그들의 색에 몸을 담궈봐야한다. 내 아이디어가 먹히기 위해선 신뢰가 바탕이다. 그래서인지 가만보면 진짜 디자인에 소질이 있는 사람들은 일찌감치 자기 브랜드를 내 사업 시장에 뛰어든다. 나는 지금 보편적인 디자이너의 삶을 말하는 것이다. 목소리 큰 사람이 매일 떠들어대는 이야기보다 묵묵하던 사람이 나지막이 던진 한마디의 힘이 크듯 말이다. (그래도 디자인 잘하면 장땡이지! 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아직 초년생일거라 장담한다.)


 그에게 메일을 한번 보내보라 했다. 당연히 편지 수준이었다. 나는 디자이너로 돈을 벌어 살지만 흔히들 '디자인하는 애들은 엑셀도 못하고 기본적인 업무 스타일이 너무 프리하지 않아?'라는 말을 결단코 듣고 싶지 않았다. 주 업무가 자유롭고 주관적 베이스라 해도 디자이너 또한 사회의 한 구성원이다. 즉 다른 부서와 소통에서 부족함 없어야 한다. 그래서 그에게 제목과 내용 더불어 가장 키포인트로 '참조'의 역할을 상세히 설명했다. 8년을 근무하면서 여전히 메일을 받았을 때 첫인상이 그 사람의 업무 능력의 기초로 판단되곤 한다. 메일을 잘 쓰면 본업도 중간정도는 간다고 믿는다. (이모티콘 금지!!)


 처음에는 의아해했다. 그가 배우고 싶었던 것은 '디자인하는 법' 일 텐데, 웬 선임이라는 여자가 자꾸 각종 회사생활 꿀팁이라 가장한 고리타분한 말만 해대는지 지겨웠을 수도 있다. 그렇게 한 달쯤 지나자 그는 수줍게 내게 말했다. 다른 브랜드에서 인턴 하는 동기들은 벌써 야근에 힘들어하는데 본인은 많은 걸 배우고 있어서 뿌듯하다고. 그저 해맑게 웃는 그를 아무말 없이 바라보았다. 녀석 밝기도해라.


드라마 [미생]

 

 본격적으로 디자인을 알려주며 그는 작업물을 뽑아냈다. 그의 작업물을 모든 디자이너가 체크할 수 있도록 폴더를 만들어 넣어두라 지시했다. 기존 파일들의 구성을 참고하여 폴더를 만들어내길 기대했다. 역시나 내 맘에 차지 않았다. 그리고 자연스레 드라마 [미생]의 한 장면을 말했다. 장그래가 회사 내부 공유폴더를 조금 더 효율적인 방식으로 모두 바꿔놓았고 그걸 본 상사는 세차게 소리를 쳤다. [미생]은 내가 사회 초년생 때 방영했던 드라마다. 해외 업체와 함께 협업하던 나의 상황과 비슷한 장면도 많았고 서류의 이름조차 비슷한 것이 많아 반은 울면서 보고 반은 공감하면서 봤던 인생 드라마 중 하나다. 그리고 앞서 말한 장면에서 엄청난 깨달음을 얻었다. 회사는 무조건적인 '효율'을 추구하지 않는다. 모두에게 적용될 효율성을 찾기엔 꽤 긴 시간과 타협이 필요하기에 '약속'을 더 중요시한다. A라는 디자인 파일을 찾을 때 적용 될 경로에 대한 '약속'말이다. 물론 효율충인 나로서도 매번 회사를 옮길 때마다 답답한 부분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 모든 상황을 오직 '나'에게 맞출 순 없다. 암묵적으로 이어 온 약속은 회사에서는 중요한 부분이다. 개인의 효율성을 언급하며 단박에 바꾸기엔 아쉽게도 쉽지 않다. 누군가는 그런 부분을 결코 바뀌지 않는 불필요한 세습이라 여길지 몰라도 나는 회사 고유의 약속은 최대한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가 이러한 것부터 차근차근 알아가는 것이 좋을거라 생각했다.(그와의 생각은 달랐을지언정)



 그와의 세 달이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중간중간 사적인 이야기도 하며 마냥 귀엽기만 하던, 무려 6살이나 어린 인턴. 그는 마지막 날 장문의 편지를 주며 심지어 눈물을 보였다. 세상에나! 얼마 전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나를 위해 울어주는 남자가 없다며 애통해했는데 돌연 이리도 솜털이 나와의 헤어짐이 아쉬워 훌쩍이는 게 아닌가. 사실 인턴이 출근하기 전까지만 해도 '절대 마음 안 주고 일만 시켜야지!'라는 못된 마음도 있었다. 그 밝은 눈동자를 보며 더 이상 악한 마음을 먹을 수 없았다. 나도 그런 시기가 있었으니까. 앞으로의 삶이 어떨지 몰라도 꽤나 흥미로울 것 같다는 그 부푼 마음을 아주 잘 알기에, 더더욱 그의 설렘을 조심스레 누르고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꺼내 쓸 수 있는 무기를 사방팔방에 심어주었다. 아쉬워하는 그의 표정에 나도 모르게 뿌듯함이 밀려오며 뭉클했지만 나는 선임이니까! 울 수 없지!


 "나중에 디자이너로 성공하면 자서전에 제 이름 석자 써줘요! 나도 유퀴즈 좀 나가보게."

 "두말하면 잔소리죠!"


 그가 떠난 다음 날, 옆자리가 휑했다. 근처에 앉은 디자이너들이 허하지 않냐 물을 때 애써 괜찮은 척했다. 사실 아주 많이 허한 날이었다. 또 한 번 최선을 다해 마음을 쏟았고 그 마음이 헛되지 않게 어디서든 제 몫 잘 해내는 디자이너로 잘 살아갔으면 좋겠다.


 

 그가 이 글을 결코 볼 수 없을 테니 편지의 일부를 살짝 공개하려 오랜만에 펴보니 괜히 부끄러우면서도 뭉클하군. 부디 그가 나의 마지막 인턴이길 바라며 이 글을 빌어 오늘도 새로운 아이디어와 고군분투 중인 전국의 모든 디자이너에게 응원의 마음을 담아 마무리해 본다.


그가 물었다. 어떤 마음으로 지금까지 일할 수 있었냐고. 간단하지. 월급 받으면 다 괜찮아져! 만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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