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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셈케이 May 25. 2024

15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자취를 시작한 지 어느덧 5년을 꽉 채워간다. 낯설기만 했던 나의 공간이 이제는 구석구석 나를 닮아가다 못해 내가 가장 나답게 흐트러질 수 있는 곳으로 변해갔다. 나의 미숙했던 20대 끝자락과 다시금 피어나는 30대 시작을 함께해 준 고마운 공간이었다. 그러나 온갖 살림살이가 함께 더해지면서 이제는 이 공간과의 고마운 이별을 해야겠다 마침내 마음먹었다.



 그렇게 마음먹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몇 개의 부동산을 돌며 시세를 파악할 무렵 한 중개인은 좋은 매물이 있다며 얼른 그 집을 구경시켜주고 싶어 보였다. 중개인 차를 타고 몇 분쯤 가니 기가 막히게 익숙한 골목이 저 멀리 보였다. 에이 설마, 저 갈래에서 다른 길로 들어가겠지? 예상, 또는 바람과 다르게 차는 익숙한 길로 들어섰다. 향긋한 풀내음도 빈티지한 떡볶이 가게도 그의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자그마한 이용원도 그와 쭈그려 앉아 한참을 예뻐해 준 길냥이를 기다리던 골목도 찰나에 후다다닥 내 시야를 스쳤다.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졌다. 통화 중이던 중개인에게 다행히 나의 표정을 들키지 않았지만 정말 당황스러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의 동네는 나의 예상 지역에 포함되지도 않았는데 중개인의 강력 추천으로 오게 된 곳이 왜 하필 그의 집 바로 앞 건물일까.


 더 당황스러웠던 이유는 전 날 밤 꿈에 그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누가 보면 아직도 그를 못 잊어 애달파하는 거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정말로, 진실로 내가 원해서 그가 꿈에 나타난 것이 아니다. 우연히 꿈에 나왔던 그와 다음날 우연히 그의 동네에 떡하니 서있는 모습에 어안이 벙벙했다.


 꿈도 불가피하게 선명했다. 오랜만에 올라탄 그의 차에서 그의 누나가 드디어 결혼하여 아이를 낳은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만나고 있는 여자친구와 사이가 소원해졌다며 내게 하소연 아닌 하소연도 늘여놨다. 이 대목이 제일 웃겼다. 내 희망사항인지 현재 실제 그의 상황인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꿈속에서도 '잘 좀 하지'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의 빈틈을 차마 욕심내지 않고 그저 꾸짖는듯한 꿈속 나의 진심에서 더 이상 그를 원하는 일은 결단코 없음을 확신했다. 그런데 왜? 그가 내 꿈에 나타난 다음 날 나는 그의 집 앞에 서있을까. 중개인이 연신 커다란 창문을 열어 주며 채광에 대해 한창 설명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단지 이곳에서 그의 이름을 크게 부르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창문을 열 듯한 어이없는 상상만 할 뿐.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그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라 자부했는데 이상하리만큼 내 삶에 너무 오래 남았었다. 나를 놓지 못하겠단 그의 이기적인 말 뒤로 어쩌면 그보다 내가 더 그를 오랜 시간 붙잡고 있었나 보다 생각했다. 물론 이제는 그 또한 아님을 잘 안다. 누구보다 그의 삶을 응원하는 무언의 일인이 되었음에 확신하지만 그럼에도 굳이 그를 빈번히 마주칠게 뻔한 이곳으로 이사 올 이유는 단 한 개도 찾을 수 없었다.


 중개인은 어떠냐 물었다. 나는 몇 초간 고민하는 연기를 펼치며 너무 좋은 집 같으나 내겐 되려 넓어서 관리가 어려울 것 같단 배부른 소리를 하고 다시 중개인에 차에 올라탔다. 익숙한 치킨집을 지나는데 저긴 여전히 맛있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동네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런 마음 있지 않는가. 분명 다 소비된 관계, 감정임에도 온 마음 다했던 그 장면들이 이따금씩 예고도 없이 찾아왔을 때.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히 눈앞에 나타나 ‘너 그때 이랬었잖아! 기억나지?‘하며 겹겹이 떠오르게 하는 순간. 그래서 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비단 그와의 연애에서만은 아니었다. 누군가와의 진심을 다한 사랑 뒤에 남은 시절 공간은 늘 내게 어려운 곳이었다. 미처 정리하지 못한 고마운 순간이 느닷없이 뛰어오를까 봐. 또는 꾸역꾸역 눌러두었던 내 상처가 못내 책임을 물어올까 봐.


 이 동네 또한 노력해서 피해왔었다. 택시 네비가 이곳을 안내해도 애꿎어 다른 길로 부탁드렸고 버스를 탈 때도 가급적 이 동네를 피하려 했다. 처음에는 그 이유가 단지 그를 우연히라도 만나고 싶지 않은 어색함에서 시작되었다 생각했는데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어떤 형태로든 과거를 끌어와 현재로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끝마친 마지막 장면에서 그대로 끝마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중개인 차가 동네를 벗어날 때 생각했다. 그래서 피해왔는데 막상 오니 그리 나쁘지 않네. 어쩌면 내가 날 더 힘들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의 행복을 주제넘게 바랐다.



 그날 빈 손으로 집에 돌아왔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집 근처 부동산에 미리 연락을 해 둔 덕에 너무 좋은 집을 발견했다. 모든 조건이 완벽에 가까워 가계약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며 되뇌었다. 세상을 살며 참 많은 순간들을 마주하지만 결국 나를 위한 순간을 마주하기 위해서 거쳐야 할 순간도 있다는 걸.


 행복한 일 투성이었던 나만의 첫 공간을 떠나 새로운 공간에서 또 얼마나 어마무시한 즐거운 삶이 펼쳐질지 기대되는 나날이다. 지나온 순간들을 기꺼이 품을 수 있는 더 넓은 내가 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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