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자 작가의 「모순」 이라는 책이 다시금 유행처럼 읽히고 있는지 모른 채 우연한 기회로 읽게 되었다. 무의미한 표정으로 릴스를 내려보던 와중 결혼식 한 사회자가 버진로드 앞 행진을 기다리는 신랑 신부에게 나지막이 말하기 시작했다.
"사랑하지 않고 스쳐갈 수도 있었는데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걸음을 멈춰준 서로에게 감사합니다. 멈출새 없이 바쁘게 걷다가 지친 걸음을 멈췄더니 인연처럼 만나 서로에게 사랑을 배울 수 있었고 함께 걷다 보니 홀로 걷던 풍경보다 더 아름다웠고 혼자일 때는 보이지 않던 더 큰 세상을 만났습니다."
어쩜 저런 예쁜 말이 있을까 싶어 몇 번이고 영상을 돌려봤다. 온 우주의 기운으로 세상에 하나뿐인, 운명 같은 당신을 만났다는 소설 같은 말보다 스쳐갈 수 있었는데 사랑일지도 모른채 걸음을 멈추어 마주한 인연이라는 말이 사막 같던 내 로맨스 행성을 뒤흔들어버렸다. 그렇게 출처를 찾다 보니 양귀자 작가의 소설에 나온 구절을 각색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말하는 사랑, 삶에 대해 궁금해져 책을 사 단번에 읽어버렸다.
책은 사랑 외에도 삶을 살아가며 스스로 정의 내리는 숱한 과정들이 그려져 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내가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 사랑의 의미, 삶을 바라보는 태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주인공 안진진이 마치 나라도 되는 양 과한 몰입으로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마다 애써 묻어둔 자잘한 감정들이 솟아올라 부끄럽기도 했다.
퇴근 후 정류장에 내리자 사랑하는 그가 연락도 없이 서있던 날. 이유 모를 서러움과 안도감이 동시에 찾아와 눈물이 왈칵 날 것 같았던 그날. 울상 짓는 나를 보고 뭐가 그리 재밌는지 히죽 웃으며 내 손을 잡고 향한 한 아이스크림 가게.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좋아하는 맛 아이스크림을 받아와 건네던 그 마음. '오늘 힘들었지?'라는 말 한마디 없이도 무한한 위로와 응원이 뒤섞인 사랑. 그 일상적인 사랑이 내가 정의하는 가장 거창한 사랑이 아닐까 생각했다.
진진이 물었다.
"그때, 내가 왜 좋았어요?"
그러자 그는 앞이마를 가리는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내 이름은 안진진, 할 때, 그리고 조용히 안진진을 찾으세요,라고 말할 때 갑자기 그런 예감이 들었지. 아, 앞으로 아주 오랫동안 조용히 이 안진진이라는 이름을 부르겠구나, 하는 예감. 나한테 그런 느낌을 준 여자는 처음이었거든."
-양귀자 작가의「모순」中-
나는 모순적으로 사랑을 대했다. 내가 정녕 사랑하는, 사랑의 가치는 나의 이름을 아무 이유 없이 다정히 불러주는 그 찰나에서 피어났다. 그런데 막상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가치를 가슴 깊숙하게 욱여넣고 자꾸만 더 그럴싸한 사랑을 빚으려 했다. 내 사랑을 삶의 트로피 삼아 꽤 괜찮은 사랑을, 삶을 살고 있다 자부하고 싶었는지. 나는 그저 나인데 오롯한 나보다 더 나은 내 모습을 보여주려 했고 관계를 위해서라는 명목하에 상대를 잔인하게 헐뜯었다. 그래놓고 다정히 이름을 불러주는 그 찰나를 사랑했다 말할 수 있을까. 내 사랑이 두고두고 내 삶에 붙어있지 않고 자꾸만 방황하는 이유는 '나다운 사랑'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안진진이 스스로 사랑이라 여긴 그 무수한 이유를 덮고 현실적인 선택을 했다 해도 이해한다. 어떤 사랑도 감히 타인의 정의는 무의미하기에. 그래도 나는 말이다.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고, 더 괜찮은 관계의 일부가 되고 싶었는데 말이다. 이제는 모두 내려놓고 오롯하게 나의 이름을 불러주는, 아이스크림이 입에 묻어 또 한 번 말없이 쓱 닦아주는 그 사랑스러운 행동 하나에 온 맘 다해 당신을 사랑하겠노라 당당히 말할 수 있는 내가 되려 한다.
잊고 살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사랑하는 찰나들을. 나의 사랑을 하겠노라, 사랑하지 않고 스쳐갈 수도 있었던 순간이라 하더라도 그 순간을 향해 시선을 돌릴 수 있는 내가 되겠노라 책을 닫으며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