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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셈케이 Dec 19. 2024

2025 나에게 보내는 편지

너와의 모든 지금


 '내게 언제의 나를 사랑하냐고 물으면 바로 지금'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가사에 길을 걷다 속도를 늦췄다. 지금의 나를 사랑할 수 있는 것, 엄청난 능력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내 삶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고민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기'였기에 당당히 지금의 나를 가장 사랑한다 말하는 노래가사에 많은 생각이 스쳤다.

 올 한 해는 뭐랄까, 고민의 고민의 고민이 이어져 어떠한 답은 얻지 못했다 한들 스스로 한 층 단단한 표피를 얻은 기분이었다. 그 사실이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아름답고 멋있고 좋은 것으로 가득 찬 한 해도 모자란 소중한 날들을 온갖 잡다한 고민들로 꽉꽉 채운게 못내 아쉽기도 했다.  


 남들에겐 유쾌하고 밝은 성격의 나지만 현관문 도어록이 '띠리릭'하고 닫히는 순간 온전한 나로 돌아온다. 물론 유쾌하고 밝은 부분은 나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기질인 건 분명 하나 진짜 내 모습은 그 누구에게도 굳이 내비치지 않는, 그래서 나만 아는 그런 나로 돌아오면 나도 모르게 누적해 온 슬픔과 고독이 한 번에 와르르 나를 무너뜨리곤 했다. 한 날은 회사에서 디자인 품평을 잘 마무리하고 긴장이 풀려 너덜너덜 돌아온 날이었다. 샤워를 하고 가장 좋아하는 파자마를 입고 소파에 앉자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그 눈물은 멈출 생각도 없이 하염없이 뿜어져 나왔다. 우는데, 그 울음이 더 서럽게 만들어 실컷 울고 나니 한결 개운해졌다. 감정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그렇게 눈물에 녹여 토해내는 건가 싶을 만큼 우는 내내 서러웠다. 일도 잘 마무리되었고, 부모님은 제주 여행 중 즐거운 사진을 보내주시고 계셨고, 평소 갖고 싶던 물건도 배송 중이란 알람이 왔다. 좋은 하루의 마무리여도 되었을 그날, 나는 참을 수 없는 슬픔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그 슬픔은 어디로부터 왔을까 고민 하던 때가 있었다. 불과 몇 년 전이다. 이제는 조금은 알 것 같다. 출처는 없다. 아니 애당초 중요치 않다. 적정선을 채운 슬픔이 비워내기 위해 나를 건드렸을 뿐이다. 다시 0으로 돌아가 또 천천히 쌓아가겠지. 그러다 비워야 하는 날이 오면 또 비워내면 되겠지. 그렇게 살아가는 게 가장 나다움을 받아들이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친구의 물음에 기쁘면 웃고 슬프면 울고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가지 뭐라고 답하자 그녀는 피식 웃으며 "나도"라고 답했다. 우리네 삶이 겉보긴 하늘과 땅차이 같다가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거대한 틀 안에서는 비슷한 온도의 기쁨과 고독의 반복 속에서 각자의 방법으로 살아가는구나 또 한 번 느꼈다.




 '날 알아보고 날 믿어주는 너와의 모든 지금'


 그런 환상이 여전히 있다. 다른 이들은 보지 못하는 내 정수를 누군가 알아봐 주는 찰나를. 환상이 아니라 이젠 그게 가장 중요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수 이지혜씨가 나온 한 영상에서 남편과 마주 보고 앉아 이런 말을 했었다.

 "내가 따뜻한 면이 있다는 걸 여보밖에 몰라. 사람들은 다 몰라."

 "우리 와이프 따뜻한 사람이야."

 가끔 이지혜씨와 남편의 대화 영상을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참 따뜻해졌다. 앙칼지고 명료해 보이는 그녀가 남편 앞에선 부드러운 카스테라가 되어 순순히 해체되는 그러한 느낌. 다른 사람 앞에서 애써 보이려 하지 않은 순수한 내 모습을 기꺼이 보여줄 수 있는 평안함. 내가 생각하는 사랑과 참 닮아 있었다.


 오늘 예쁜 옷을 입었네? 란 말보다 오늘 하루 꽤 고단했나봐라는 말 속 사랑의 진가들이 가치 있게 빛난다.(전 자의 말도 좋다 킥) 그리고 그러한 사람이 되기 위해 사랑을 채워간다.




 '아무것도 아닌 건 아무것도 없었어. 지나간 모든 순간들'


 고마웠다. 나의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3명의 유명인이 내게 이렇게 말해줘서. 내 글에 유독 '나이'에 관련된 글이 많은데 그 이윤 기록의 습관에서 비롯되었다. 언제 뭘 했고, 누굴 만났고, 어떤 이별을 했고, 어떤 사랑이 시작되며, 또 어떤 마음가짐을 다잡았는지.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한 해 한 해 대표 키워드도 매번 변하고 한 살씩 더해가는 것에 더한 의미를 부여했는지도 모른다. 매번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올해 역시 아무것도 아닌 순간들은 없었다고.

 관심도 없어하는 남자에게 사랑을 고백했다며 하소연하는 후배와 술 한잔 하던 날. 자신의 행동이 후회된다는 그녀에게 괜찮다고, 다 경험이라는 진부한 말론 부족해 보였다. 다 지나고 보면 아무리 엿 같다해도 딱 한 가지는 네 삶에 남아 자양분으로써 역할을 해줄테니, 당장은 이불킥으로밖에 표출할 수 없는 그 감정을 잠식시키는데만 집중하라 말해주었다. 내게도 무수히 돌이키고 싶은 순간이 찾아올 때 마다 끝내는 헛웃음 지어졌다.

 '이게 또 이렇게 쓰이네?'


 아무것도 아닌 건 정말 없었다. 정말로.



 

'하루쯤은 그냥 구겨 던져버려. 온몸으로 막아도 내일은 올 테니까'


 빨래도 쌓여가고 집 청소도 며칠이나 미뤄뒀다. 소파에 쌓여있는 옷들을 헤쳐가며 좁은 자리에 앉고 난 뒤 새우깡을 우걱우걱 먹으며 오랜만에 영화 '노트북'을 봤다. 가끔은 그렇게 제일 하기 싫은 일을 미루고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명랑함도 필요하다. 성격 상 빨래도 청소도 설거지도 그때 그때 해버리고, 먼지 한 톨 없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타입이지만 이따금씩 그런 내게 지쳐올 때쯤 자체 파업에 돌입한다. 처음 파업을 선언했을 때는 괜히 신경 쓰였다. 티비를 보다가도 쌓아있는 빨랫감이 눈에 들어오고, 먼지가 보였지만 눈 딱 감고 몇 번을 반복하니 더이상 신경쓰이지 않았다.

 그 결과는 '내일 또는 모레의 내가 분명 한다.'라는 경험이 만들어준 안정감이었다. 그저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무방비로 전가하는 것이 아닌 나만의 새 루틴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정말 미묘하다.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오로지 나만의 소소한 변화이자 노력이다. 그런데 말이다. 우리는 이러한 변화들을 무수히 마주해야 한다. 그래서 꾸준히 나를 관찰하고 다독이고 지켜봐야 한다. 훌륭한 위인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저 나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다. 더 정확히는 살아내기 위해서다. 본래 멈춰질 수 없는 형질의 우리기에 자꾸만 어떤 방법이 내가 더 나을지 고민하게 된다. 나다워진다는 건 내게 관심을 주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감정에, 태도에, 건강에, 외모에 그 모든 부분의 나를 말이다.

 

 내 기쁨과 슬픔을 인지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나로, 그 과정을 자연스러운 변화라 인정할 수 있는 나로, 나는 지극히 평범하지만 그래서 더 고단했던 과정들과 마주하며 한층 더 단단해진 나로 올 한 해를 마무리하려 한다.


 

 내년은 또 어떤 한 해가 될까. 어떤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단언하고 싶진 않다. 올해 얻은 자양분은 주어진 한 해를 나답게 살아가게 할 에너지기가 되어 줄거라 생각하기에 그것 만으로 충분하다. 그래서 내년을 향하는 편지에는 다른해와 달리 노래가사로 한 해의 글을 정리해봤다.


 2024년, 나의 서른셋이 저물어 간다. 나와의 한해가 저물어 간다.


(feat. 재쓰비 - 너와의 모든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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