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하고 있어
벌써 한 해 편지를 쓰는 12월이 왔다. 세월이 참 잘 간다는 말이 최근에 와서 피부에 와닿는다. 올 한 해, 그러니까 나의 서른둘에 대해선 하고 싶은 말이 참으로 많다. 올해는 처음으로 해본 것들이 많았다. 혼자 3박 4일 제주 여행을 다녀왔고 생일에는 홀로 정동진을 다녀왔다. 생각나는 위스키를 먹으러 혼자 바를 찾아갔고 오랜 시간 못 본 지인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 짧은 연애를 끝으로 다시는 '이 정도면 시작해 보자'라 연애를 가벼이 생각말자 스스로를 혼쭐 내고 돌아서니 무더운 여름이 와있었다. 새로운 사랑을 찾아 적지 않게 소개팅도 하면서 나의 취향과 상대가 바라보는 나의 모습을 조금 더 섬세히 알아갔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의 몹쓸 틀을 깨부수고 무수한 시간들을 덕지덕지 새롭게 묻혀갔다. 그래서 때론 혼란스러웠고 또 때론 설렜다.
작년 이맘때 한 해 편지에 '남이 아닌 나의 마음에 귀 기울이고 싶다'라 썼는데 어쩌면 소망대로 남이 아닌 내 삶에 집중한 한 해가 아닌가 싶다. 인생을 살면서 스스로 서 있을 힘이 있어야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어줄 단단함도 있다 생각하기에 소중히 그리고 열심히도 한 해를 살아왔다. 그래서 올해의 한 해 편지에는 스스로에게 칭찬을 해주고 싶다. 잘 살아왔다고.
제주 여행을 떠났던 여름, 비양도를 향하는 배안에서 생각했었다. 인생은 참 신기하고 재밌다고. 서른둘 여름휴가로 혼자 제주에 와 겨우 이름정도만 아는 섬으로 들어가고 있는 현실이 재밌고 묘했다. 이게 앞으로 내 삶에 자주 등장할 신비함이자 낯섦이 아닐까 이어 생각했다. 언제나 내가 예상한 대로 풀리지 않는 삶 속에서 그저 흐름대로 떠내려가 보기도 하고 당황스러운 상황을 침착하게 받아들이는 진짜 어른다운 면모를 쌓아가고 싶었다. 어느 정도 성공한 것 같지만 여전히 부족하기에 꾸준히 내면을 다채롭게 만들어 나갈 생각이다. 새로 산 옷을 입는것과 엇비슷하다. 이전에 겪은 힘든 상황과 똑같이 마주해도 조금 더 견고해져 다소 대수롭지 않게 대처하는 내 모습에서 새롭고 신선함을 느꼈다. 새 옷을 입었을 때의 기분처럼 말이다. 진짜 옷장보다 내면의 옷장이 더 다양하고 풍성하길 바라면서.
제주 여행 때의 글을 쓰며 사실 부끄러워서 다 담지 못한 마음이 있다. 3박 4일의 여정을 끝으로 돌아오는 비행기가 이륙하자 눈물이 흘러나왔다. 제주에서 뜨거운 사랑을 함께 다짐했던 당신도, 여러 가지 관계적 무게로 버거웠던 마음들도, 더 잘 해내야 한다는 무의식적 부담감도 모두 돌담사이에 꿰어놓고 온 듯해서, 그게 너무 홀가분해서. 그리고 마음 한켠 '지금처럼 재밌고 건강하게 살자'라는 마음으로 가득 채우고 비행기는 유유히 제주를 떠났었다. 누군가는 내 나이에 결혼을 하거나 이미 결혼을 해 사랑스러운 아이가 있을 수도 있다. 또는 전세계 다양한 나라를 돌아다니며 스스로를 찾아가고 있거나 여전히 이루고 싶은 꿈을 위해 자신의 자리에서 애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양하게 살아가지만 그 수많은 서른둘 중에 나의 서른둘도 내겐 너무나 특별하고 소중하다. 비록 곁에 그 누구도 진득이 스며들지 못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홀로의 한 해였지만 어쩌면 이러한 한 해를 선사하기 위해 하늘이 인연의 길을 다 막아둔 게 아닐까 생각 들 만큼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고맙고 또 고맙다.
관계에 있어 생각이 깊고 그럼에 분명해졌다. 마음이 조금 상해도 내가 더 이해하고 말지 넘기며 관계의 의미를 더 중요시 여겼다. 그러나 그 의미는 상대적일 때 빛을 발한다. 결국 상대도 관계가 소중했다면 나와 같은 생각을 했어야 마땅한데 이해받고 존중받는 것에 되려 너무 익숙해져 마치 누군가의 당연한 역할인 듯 전가해 버리고 일정 시간이 지나 미안하다는 의미 없는 사과들로 채웠다. 지쳐버렸다. 본인의 삶 속에서 필요에 의해 선택되는 내 존재에 더 이상 마음이 상하고 싶지 않았다. 이성과의 이별과 달리 애꿎어 구구절절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저 바람에 흩어지게 두었다. 떠나가라 고사 지내지 않아도 희한하게 내가 놓으면 놓아지기도 했다. 마음 아프지 않았다. 사랑도 우정도 그 어떤 관계에도 대충은 없었던 나이기에 모든 관계의 정해진 숙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그 와중에 한 후배가 그런 말을 해주었다. '선배가 제 인생에 있어서 너무 고마워요. 놓치지 않을 거예요.' 김희애도 울고 갈 대사를 앙칼지게 하던 그녀를 징그럽다며 떼어냈지만 내심 고마웠다. 그 사소한 한마디면 되었는데 참 당연하게만 생각하는 인연들 몇몇으로 꽤 오래 속앓이를 했다. 이제는 비로소 괜찮아졌다. 그렇게 보낸 한 해의 끝자락. 많이 가뿐해졌다.
어디서부터 새롭게 시작할지도 모르는 사랑이 벌써 설렌다. 좋아하는 취향을 바꿀 순 없지만 이성을 바라보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가 생겼다. '문제 해결 능력치가 서로 상통하는지' 예상보다 많이 고리타분한 말일지 몰라도 대부분 연애에서 이 부분이 화두에 오르며 이별을 반복했었다. 동일한 성향은 애당초 욕심이라면 다르더라도 같이 맞춰가며 '우리만의 방법'을 강구할 의지와 마음이 나와 같은지를 보게 되었다. 희한하게 이러한 마음이 굳혀지자 머지않아 만날 것 만 같아 혼자 설레고 난리도 아니었다. 새로움은 늘 용기가 가득 찼을 때 불안함마저 모조리 설렘으로 바꿔주었다. 그런 걸로 미루어 봤을 때 더이상 사랑에 있어 두렵지 않다.
서른셋, 어떤 한 해가 될까? 엄마는 늘 이십 대 보다 삼십 대가, 삼십 대보다 사십 대가 더 즐거웠다고 말해주셨다. 그런데 진짜였다. 이십 대의 삶이 흥미롭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이십 대는 흰 도화지에 제멋대로 그림을 그려 망쳐보기도 걸작을 탄생시키기도 종이를 구기고 찢고 또 붙이고 정답 없는 정답을 찾아갔다면 삼십 대는 좀 더 두툼한 종이와 다양한 용품들이 더해져 숨겨둔 예술성을 마음껏 발휘해 볼 수 있었다. 굳이 종이를 찢거나 붙이지 않았다. '잘못 그렸네. 다시 그리지 뭐'하는 여유로운 마음도 생겨났다. 그래서 나의 내년이 많이 기대된다. 어떤 그림을 무슨 색으로 어느 정도 채워 가 볼까 싶어서 말이다.
유년시절, 어린이 프로그램 <혼자서도 잘해요>를 보며 엉덩이를 씰룩대던 아이가 어느덧 자라 서른셋을 고대하고 있다. 내가 살아온 한 해 들이 모여 언젠가 지금의 이 순간도 찰나로 기억되겠지만 그래서 더 재밌고 즐겁게 살아가고 싶다. 설령 누구도 해석할 수 없는 그림일지라도 그리는 순간 마음이 내내 행복했다면.
내 삶에 다시 새롭게 등장할 숱한 장면들을 기꺼이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내게 되는 한 해가 되길 바라며 23년도의 문을 서서히 닫아보려 한다.
잘 살았다. 올 한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