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한 사람이 되자
곧 서른둘이라는 나이가 된다. 더 이상 서른이란 프레임에 우울해하지 않지만 혹여나 힘든 마음이 들 때면 ‘난 어른이니까. 무려 서른 하고도 하나잖아.’ 라며 슬픔을 재빨리 외면하는 몹쓸 습관이 생겼다. 작년 이맘때 2022년 내게 쓴 편지에 힘 좀 빼고 살자고 써보았지만 결국 더 힘주고 산 한 해를 보냈다.
이별도 했고 재회도 했고 또 이별도 했다. 이직도 했고 미미하지만 월급이 올라 적금도 하나 더 들었다. 아픔을 이겨내는 시간과 새로운 페이지를 기대하는 설렘이 한 데 섞여 오묘한 감정선을 만들어냈다. 이룬 것과 잃은 것의 범벅인 한 해가 지나간다.
나이를 더해갈수록 단단한 관계들로 인연이 정리되어 보다 심플해지지만 마음은 묘하게 조금씩 더 외로워진다. 혹여나 내 고민이 돌덩이처럼 그들의 한켠에 남을까 싶어 차올랐던 이야기를 삼켜낸다. 엄마는 내게 늘 말한다. ‘남을 챙기려는 마음이 외로움으로 바뀌지 않도록 적당히 널 생각하며 살아’라고. 나는 그런 엄마에게 답한다. ‘나 굉장히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사람이야’.
라고 말하던 나는 '계산적'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친절과 배려가 과해 때론 나 자신에게도 질릴 때가 적지 않다. 한 날은 친한 후배의 업무 요청이 들어왔고 내 일인 듯 최선을 다해 함께 해결해 주곤 시계를 보니 퇴근시간이다. 후배는 메신저로 고맙다는 짧은 인사와 함께 로그아웃이 되었다. 나는 뭘 원했기에 씁쓸한 것일까? 분명 특별히 바란 것은 없다. 단지 이유 모를 헛헛함이 한동안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게 했다. 그게 내가 가장 싫어하는 내 모습이다. 매 순간 열정적으로 상대를 대하지 않길 바랬다. 적당히 필요한 만큼만 도와주고 돌아오는 심플한 인사에 더 인자하게 답해주는 넉넉한 선배이고 싶었다. 또 고개를 푸욱 숙여본다.
또 어제는 가끔 밥을 같이 먹는 회사 동료에게 드디어 반년만에 헤어짐을 고백했다. 미주알고주알 물어볼 것 같았는데 그녀는 꽤나 담백하게 말해주었다.
‘대리님이 선택한 이별엔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 같아요. 응원해요’
웃겼다. 이런 대답을 들을 줄 알았다면 진작 말할걸 뭘 그리 망설였을까. 뭐가 그리도 두려웠을까. 고민 없던 호의는 불필요한 고민을 얹었고 고민 많던 대화는 의외의 고마움을 만들었다. 거절을 어려워하는 것도, 마음을 다 쓰고 못내 씁쓸해하는 요상한 심보도, 고민을 줄이고 조금 더 대담해지고 싶은 내 마음 모두 엉켜 붙어 더 단단한 나로 만들어주길 바라본다.
다가오는 한 해에는 남이 아닌 나의 마음에 귀 기울이고 싶다. 내가 뭘 원하는지. 내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은지 말이다. 사실 조금 씁쓸한 이야기지만 작년 이 맘 때도, 올해도 나는 조금 슬프고 적적하다. 의도치 않게 삼십 대가 된 후의 겨울은 늘 외롭고 쓸쓸했다. 부디 내년에 이 글을 쓸 때쯤 나는 비로소 평온을 되찾았노라 써 내려가고 싶다.
마음을 도려내고 일상을 살아가고 더 나은 한 해를 맞이하기 위해 힘껏 웃어보는 12월. 올해 정말 수고 많았다고 나 자신을 다독이고 싶다. 적당히 친절하게 적당히 사랑스럽고 그렇게 적당히 마음을 나눌 줄 아는 현명한 나로 살아가 보자.
안녕. 서른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