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뿔싸. 말도 안 되는 순간 사랑이 피어오른다. 꽁꽁 숨겨두진 않았지만 그렇다 하여 여유롭게 풀어놓지도 않은 마음들이 이따금씩 일탈을 하려 할 때, 그러한 마음들을 주워 담기 바쁘다. 아직 덜 아문 상처 때문일 수도 다신 이별하고 싶지 않은 누적된 근심들일 수도 있다. 그렇게 꾸역꾸역 마음을 주워 담다가도.
“그냥, 너도 힘들겠다 싶었어.” 라 말하며 당신이 나를 지긋이 바라볼 때, 나는 설렘이 아닌 경외심이 들곤 한다. 다신 내 삶에 사랑이 찾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2초의 문장에 무너지는 마음 때문에.
또 한 번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세제를 어느 정도 넣어야 할지 고민하다 부어버린 덕에 새하얀 거품들이 끝도 없이 나오는 세탁기를 그저 바라보고 있을 때, 버스에 올라타 연신 손을 흔들며 웃어 보이는 엄마를 바라보다 울컥 눈물이 터질 듯 슬픔이 밀려올 때,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을 끝끝내 받아들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때, 하기 싫은 일을 기어코 해내려 한숨을 지어낼 때, 나는 그 시간들 사이에서 어설프게나마 어른이 되어감을 느꼈다.
키가 자라고 몸집이 커지고 돈을 벌고 화장이 짙어진다 하여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대단한 사건을 통해 어른이 되는 것 또한 아니었다. 우습게도 어른은 겪지 않았으면 했던 찰나들을 겪어내며, 다시금 0으로 돌아오려 헤엄칠 때, 그때 서서히 마음의 근육과 사고의 밀도들이 커나갔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을 결코 부정할 수 없게 됐다.
사랑도 같은 맥락이다. 사랑이 뭐냐는 질문 앞에 여러 답을 내놓을 때는 사랑이 뭔지도 몰랐었다. 사랑이 겹겹이 쌓일수록 더더욱 사랑을 모르게 된다. 그래서 사랑이 뭐냐는 질문에 그저 웃음 짓게 된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해진다. 내게 사랑으로 다가오는 감정의 형태를 보다 선명히 빚어내기 시작한다. 때때로 진실이 아닌 실루엣의 등장에 바짝 긴장하지만 경험이라는 합리화로 섣불리 시작하지 않는다. 우리의 사랑은 이미 충분히 열정적이었고 충분히 무모했었다. 그래서 찬란했을지도.
사랑에 대한 정의에 있어 쉽사리 답하지 못했을지언정 삶에 사랑이 필요하냐는 질문에는 당연히 'yes'라고 답할 수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랑은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 준다. 내가 알던 세상보다 더 넓은 시야를 확보해 주고 부족했던 나의 일부를 직면하게 해 준다. 의도치 않게 행운이 찾아온 듯 온 마음이 일렁임으로 가득 차다가 세상을 다 잃은 듯 슬픔으로 채워지기도 한다. 매일이 행복할 순 없지만 지나간 자리에 숱한 여운들을 남겨 내내 삶의 향을 풍긴다. 그래서 사랑이 오래 비워진 자리에는 척박한 마음과 텁텁한 냄새가 진동을 한다. 그렇게 사랑에 웃고 울더라도 가급적 인간의 삶에 내내 사랑이 있어야 한다. 그랬으면 한다.
사랑을 논하면 이별이 빠질 수 없다. 꽤 상당 수의 사람들이 이별을 겪고 난 뒤 새로운 사랑을 두려워하곤 한다. 이토록 아프고 시린 경험을 몇 번 더 해야 비로소 이별 없는 사랑을 얻게 될 것인지 아득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사랑을 했으면 한다. 감히 내 경험을 더해 말하자면 사랑을, 연애를 하는 동안 나는 온전히 사랑을 주고받는 사람이었고, 이별을 하고 나서야 나의 모난 부분을 인정하고 성찰할 수 있었다. 지금의 나는 사랑에 꽃 피우던 찰나보다 슬픔에 몸부림칠 때 더 많이, 더 크게 나를 성장시켰다. 그렇기에 이별의 고통 또한 사랑을 내내 했으면 하는 나의 이야기에 포함되는 영역이다.
혹시 당신들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을까? 나의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나는 치약을 짜고 양치를 시작할 때 "너는 치약에 물을 안 묻히고 바로 양치해?"라 묻던 뜬금없는 과거의 그의 말이 종종 거울을 뚫고 튀어나온다. 그다지 의미 있던 말도, 순간도 아니었는데 희한하게 양치를 하려고만 들면 꽤나 자주 그의 말이 떠올랐다. 또 다른 경우도 있다. 빵보다 밥을 좋아하는 식성임에도 당시 남자친구가 사다 주던 빵을 곧잘 먹는 걸 보고 그는 "누가 밥순이래? 빵순이야 빵순이!"라는 그의 말이 빵 한 점을 뜯을 때 이따금씩 떠오른다. 그럼 이어 마음속으로 "난 진짜 밥순이라고!"라 무언의 항변까지 연이어 떠오른다. 기억력이 뛰어나지도 않은 내가, 기억할만한 순간이 아니라고 생각 드는 일상의 찰나들을 껴안고 살아가는 걸 느꼈을 때. 나는 이름도 얼굴도 다른 그들이 보고 싶긴커녕 그저 미소가 지어졌다. 사람들은 서로 사랑해 마주 보고 있어도 웃음이 터지는 시간들을 '사랑'이라 일컫지만, 온 우주를 통틀어 내 삶을 비집고 들어온 그들이 만들어 낸 내 삶의 일부들이 지금의 내가 된 모든 시간들이 '사랑'이라 여겨져 따스한 미소로 녹여 흘러나왔다. 그저 '사랑'은 사랑하고, 보고 싶고, 미워하다 또 용서하고, 싸우고, 토라지고, 오해하다 결국 상처 줘버리는, 끝끝내 각자 다른 길을 선택해 완연한 남이 되는 그 일련의 과정 속에서도 여전히 '사랑'의 의미는 진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누가 알았겠는가. 양치질을 하면서 대단치도 않은 말이 떠오를지.
길게는 수년, 짧게는 수개월 이별 후 혼자의 시간을 보내며 참 많은 글을 썼다. 이상하리만큼 연애를 하고 있는 도중엔 글이 잘 써지지 않았다. 내 글의 자양분은 '부재', '상실'인가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이별의 글, 이전 사랑의 반성문이자 감상문은 결코 한 페이지의 연애를 끝마치고서야 가능했기에 그러했던 것이다.
사랑은 수시로 삶에 찾아온다. 비단 이성의 사랑이 아니더라도, 택시에 내리는데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요."라 말해주는 기사님에게 받은 인류애도 사랑의 일부다. 그러한 사랑들을 마주할 때 어떠한 자세로 바라보는지에 따라 사랑의 가치는 무수하게 다른 의미로 남겨진다. 내내 사랑하자는 말, 누군가를 내내 사랑하자는 말을 넘어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우리가 되자는 나의 소소한 마음을 이 글에 녹여본다.
사랑의 글을 이어 써보려 한다. 아프고 시려 다시는 사랑 따위 안 하겠다 울부짖던 밤을 지나 여전히 나는 사랑이 좋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