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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작은 순간을 사랑해

by 셈케이


집으로 가는 길, 이맘때 동네에 덩굴장미가 예쁘게 피는 담벼락이 있다. 어느 해는 담벼락 앞에서 수줍게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던 노부부가 있었고, 또 어느 해는 대학생 커플이 대담하게 뽀뽀를 하고 있기도 했다. 남사스러운 장면이지만 영화의 한 장면만큼 로맨틱해 보였다. 그만큼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나 아름답고 설레는 곳이라 매 해 덩굴장미가 피어오르는 계절이 오면 어떤 그림을 마주할지 기대가 된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달랐다. 운동을 마치고 담벼락을 지나치다 50대 중년의 한 남성분이 담벼락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처음엔 길을 잘못 들어섰나 싶었지만 이내 핸드폰을 들고서 장미를 찍기 시작했다. 그 행위자체가 다소 부끄럽고 수줍었나 보다. 장미를 가까이 찍기도 하고 멀리서 찍기도 하고 요리조리 다양하게도 찍는 그를 보며 문득 궁금해졌다. 저 사진은 누구에게 전해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장미가 폈어요. 너무 아름답죠?"라고 메시지를 보낼까? 아니면 평소 꽃을 좋아하시던 어머니께 "어머니, 붉게 핀 장미 좀 보세요."라고 메시지를 보낼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함께했던 공간을 추억하러 왔다가 아쉽게 한 장의 사진을 남기고 갔을까. 나는 담벼락을 스치는 그 찰나 수많은 생각을 했다. 어떤 의미로, 그리고 이유로 장미를 수줍게 찍던 그의 모습에서 '사랑'을 엿볼 수 있었다. 타인을 향한 사랑일 수도 스스로를 향한 사랑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만원 지하철에 타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을 때 문득 장미가 한가득 핀 담벼락이 생각났다. 내게 사랑은 시선이 머무는 것을 더 자세하고 깊게 바라보는 것이란 생각이 밀려왔다. 예쁜 장미를 찍는 그 자체가 사랑이었는데 혹여나 더 거창하고 그럴싸한 무언가를 형용하려 한 것은 아닐까 싶었다.

돌이켜보면 가디건을 챙겨 입자 내 이야기를 줄곧 듣던 그가 에어컨 리모컨이 집어든 순간, 횡단보도를 거닐며 눈이 마주친 아이에게 씽긋 웃어주던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지친 내게 왜 힘들었는지 구태어 묻지 않고 앞접시 가득 찌개를 떠주던 그 순간, 수백 번 사랑한다는 말보다 지긋이 나를 바라봐주던 그의 시선이 내게는 사랑이었다.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 찰나였다.

사랑이라는 존재는 점점 더 복잡해진다 생각 들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랑의 의미는 점차 단순해진다. 불필요한 감정과 과정을 제치고 진짜 오롯한 사랑으로써 정수가 남는다. 단순해졌지만 그 단순함이 되려 어려움으로 승화되어 간다.




사랑이 유독 그렇다. 서툴 때는 잘 몰랐지만 여러 사랑이 지나가고 나니 작고 나약한 부분을 깊게 바라보기 시작하면 그제서야 진짜 사랑으로 물들어간다는 것을 배웠다. 별거 아닌 거라 생각한 찰나마저 크고 대단하게 바라보기 시작하면 그 또한 진정 가치로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사랑이라 믿는, 사소한 찰나들의 힘을 내내 믿어보려 한다. 매 해 피어나는 장미를 기다리는 설렘과 동시에 또 어떤 사랑들이 그곳을 스칠까 기대도 더해지며 작은 사랑을 위대하게 바라볼 수 있는 내가, 우리가 되길 바라며. 그러다보면 결국 당신과 내가 마주앉아 '우리의 사랑'에 대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지도 모르기에. 나도 그러한 사랑을 사랑이라 일컫는다며 당신의 이야기에 맞장구 치며 말이다.


작은 순간을 사랑하자. 그 순간의 가치를 믿으며 살아가자.

회색빛의 삶이 이어지더라도 순간을 사랑하며 살아가자. 당신도, 나도. 우리 모두.


작은 찰나를 찾아 하염없이 걷던 유월의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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