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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나를 찾아 떠나는 여정 그 출발은 퇴사

by 셈케이


한참 글을 쓰기 어려웠다. 특별한 일이 있어야만 할 것 같았고 누군가에게 유의미한 이야기를 들려줘야 한다고 생각해서일까. 아니면 그냥 내 삶에 무기력이라는 시절 친구가 또다시 찾아와서일까. 어떤 글을 써야 할지조차 고민하지 못했다. 아니, 안 했다.


직장생활 10년을 꽉 채우기 몇 달 앞두고 돌연 퇴사를 했다. 빙그레 웃으며 퇴사를 통보하니 그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었다. 팀장과 승진이라는 달콤한 제안도 그다지 와닿지 않았다. 내게 필요한 건 사회적 성공도, 물질적 보상도 아닌 그저 무념무상의 시간을 갖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그런 나의 선택을 무모하고 어리석다 생각할지라도 나는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려 한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삶을 살아보니 인생에 '그냥'은 없었으니까.


퇴사를 하고 처음 맞이하는 월요일 아침 눈이 떠졌다. 그간 바쁘다고 미뤄둔 운동을 남들 출근할 때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아침에 처음 방문한 헬스장엔 오후과 비교될 정도로 사람이 적었다. 오후만의 활기는 없지만 쾌적하고 상쾌함이 느껴졌다. 클래식 음식이 흘러나와도 무색할 만큼 말이다.

한껏 땀을 내리고 집에 돌아오는 길 장을 봐 늦은 아침을 차렸다. 운동 다음으로 마음먹은 것, 나를 위해 밥을 차리는 것이었다. 자취 7년 차답게 그새 차곡차곡 쌓아온 요리 솜씨에 나조차 놀랄 지경이었다. 동시에 씁쓸해졌다. 이 간단한 행복을 왜 평소엔 찾지 못했을까. 물론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해왔지만 정작 먹고살긴 했지만 그 외에 것들을 희미해져 갔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이 오글거리고도 내 삶에 가장 중요한 문장을 채우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과감히 또 확고히 퇴사를 했다.


퇴사파티를 염두해 포춘쿠키를 사업부 인원수대로 준비했다. 포춘쿠키 안 행운의 메시지도 하나하나 직접 썼다. 약 4년간 함께 애써온 동료들을 위한 마지막 진심이었기에. 생전 받아본 적 없는 대형 꽃다발과 함께 수줍은 고백을 받기도 했다. 진작 가까워지고 싶었는데 아쉽다고. 나는 나를 찾고자 퇴사를 했고 퇴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이미 나를 조금씩 발견하기 시작했다.


나를 찾는 건 그다지 많은 힘이 필요치도, 먼 길이 돌아갈 필요도 없었지만 '여유'가 필요했다. 연차를 내고 휴가를 떠나 자연을 보며 느끼는 '여유'가 아닌 내 삶을 바라볼 수 있는 그 '여유'말이다.



내가 나를 위해 차린 첫 끼는 '들기름막국수'였다. 준비시간 25분, 식사시간 15분, 뒷정리시간 30분. 효율성으로 따지면 극강의 비효율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몽글몽글 마음이 피어났다. 역삼역 갈 카페도 미리 찾아놨는데 설거지가 끝날기미를 보이지 않아 예상보다 한 시간 정도 조금 늦어졌지만 조급하지 않았다.


나는 자유의 몸이기 때문이다.




처음에 무엇이 나를 무기력하게 만드는지 이유를 찾으려 애썼다. 우울증이라 하기엔 무겁지 않았고 모든 걸 포기하고 싶기엔 회사일에 최선을 다했다. 후배도 챙기며 승진을 도왔고 여러 프로젝트를 한 분기에 서너 개 맡으며 몸도 마음도 쉴 새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 와중에 집에 언제 내려오냐는 엄마의 물음에 마음이 불편해지기도 했지만 이내 양손 가득 간식을 사 본가에 내려가기도 했다. 몇몇 친구들은 소식이 뜸해졌고 또 몇몇 친구들은 여전히 나를 붙잡고 긴 하소연을 토해냈다. 분명, 불행하진 않았다. 분명, 원래의 내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 무기력함의 근원을 찾는데 한 세월이 걸렸다.


대한민국에서 초중고를 졸업하면 으레 대학을 가고자 한다. 물론 지금은 조금씩 인식이 바뀌어가지만 재수를 하면서까지 4년제를 가려고 했던 나를 돌이켜보면 대학 졸업장이 필수인 시대였다. 취업도 비단 마찬가지였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돈벌이를 하지 못하면 마치 제대로 된 삶에서 이탈된 사람처럼 바라보는 세상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지만 나는 경제적 독립을 빠르게 원했던 터에 휴학 없이 4년을 다니고 졸업전시회가 끝날 무렵 과에서 두 번째로 취업을 했다. 나의 첫 연차가 졸업식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일찍 일한덕에 나이에 비해 연봉도 직급도 높았고 20대 통틀어 15개국을 다녀올 만큼 돈으로 누릴 수 있는 여가를 제대로 누렸다. 그렇게 서른이 되고 만나는 사람들이 하나 둘 결혼을 말해왔다.


그런데 말이다. 뭔가 이상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중학교를 가야 했고, 대학교를 졸업하자 회사에 취직해야 했다. 서른이 되고 나니 뭘 해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10대, 20대 어쩌면 사회가 짜 준 공식대로 착하게도 순종적으로 살아왔다. 물론 나를 위한 과정이었지만 결코 그 사이엔 나의 고민보다 그렇게 해야만 평범한 사람, 평범한 자식, 평범한 내가 된다고 암묵적으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후회한다는 말도 아니다. 사회를 탓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이제는 내가 원하는 삶이 뭔지 진정으로 고민해봐야 한다는 각성을 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결혼이 싫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단지 내가 책임지기 위해선 나의 심지가 필요했을 뿐이지만 그 누구도 나의 마음을 이해하기보단 상처받아했다. 그래서 나 또한 상처받았다. 서른이 넘자 여자 나이와 건강한 출산에 대한 키워드가 뒤섞이며 마트 매대에 쌓인 물건 취급에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누가 보면 대신 아이를 낳아줄 듯 걱정을 빙자한 불필요한 날 선 메시지가 온 세상을 떠돌아다닐 만큼 여전히 이 사회는 '그 나이에 해야 하는 것들'로 가득 찼다. 그럴수록 자꾸만 피어올랐다.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제대로 알아야겠다고. 삶을 끝내기 전까지도 해답을 못 찾을 수 있지만 나는 여전히 확고하다. 먹는데 15분, 치우는데 무려 30분을 투자하고도 행복했던 나만의 식사처럼 돌고 돌아 후회의 범벅이 되더라도 이 시간과 순간이 결코 '그냥'이 아님을 확신한다.


사랑은 내게 여전히 뜨거운 주제다. 그리고 나와 떼어낼 수 없는 운명과 같은 감정이자 관계다. 삶을 어느 정도 고민하고 사는지는 30분의 대화만으로 윤곽을 볼 수 있다. 좋은 직장, 좋은 차 그러나 텅 빈 듯한 대화 속에서 나는 또 한 번 깨달았다. 내 사랑은 손가락 쪽쪽 빨 만큼 가난하더라도 내일을 함께 바라볼 수 있는 그 시선을 가진 사람이란 것을. 그래서 쉽사리 채워지지 않았다는 것을. 어쩌면 스스로 험난한 길을 택한 것일지도.




퇴사를 한다고 가족과 지인에게 알렸을 때 조금 특별한 경험을 했다. 단 한 명도 내게 이유를 묻지도 다음 계획을 묻지도 않았다. 그저 수고했다고 널 위한 시간을 가져보라고 어쩌면 네 삶에 아주 따뜻한 시간이 될 거라 말해왔다. 사뭇 놀랐다. 나이가 몇인데 갑자기 퇴사냐며 다그칠 줄 알았다. 그때 한번 더 깨달았다. 세상이 날 순종시켰다고, 이 사회가 짜 놓은 수순대로 살아왔다고 말했지만 어쩌면 내가 이 사회를 그러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던 한 사람이 아니었는지. 내가 스스로 그 순리를 따르며 행복해해 놓고 이제 와서 고개를 젓는 게 아닌지.

길게 말하지 않고도 따스한 응원과 격려를 보내주던 나의 인연들 덕에 나는 '퇴사'를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서서히 나아지고 있었고 점차 '나다워'지고 있었다.


지금의 내 계획은 그렇다. 대단히 뭘 이루지 않아도 좋다. 그저 이 시간들이 쌓여 남은 내 삼십 대의 단단한 원동력이 되어주길 바란다. 그마저도 거창하다. 그리고 머지않아 다시 새로운 분야의 디자이너로 나만의 미감으로 세상을 물들일 것이다.


나다움을 찾는 것은 그냥 나로 살아가고 일상을 살아가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조금 더 나와의 시간을 갖기 위한 나의 투자. 헛되지 보내지 않도록 더 부지런히 몸과 마음을 가다듬으려 한다.


먼 훗날 나의 삼십 대를 읊으며 나는 그랬노라, 그러니 너도 괜찮다 말해줄 수 있는 어른이 되기 위해.


나를 더 사랑하는 내가 되기 위해 오늘의 점심메뉴는 알배추 전과 된장국이다. 또 한바탕 부엌을 뒤엎을 준비 중이다. 서서히 나의 색을 되찾아가는 8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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