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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 Jul 16. 2021

여행지의 마법

캠핑에 빠져있는 13년 지기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떠났다. 이제 막 가을이 시작되어 하늘은 맑고, 바람은 시원했다. 회사에서의 짐과 스트레스는 서울에 남겨둔 채였다.


신났다. 가는 내내 10대 때 들었던 노래를 틀어놓고 차가 들썩거리도록 열창을 했다. 코로나로 자체 감금 생활을 했던 탓인지, 나무 우거진 캠핑장에 도착하니 정말 ‘살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다들 신이나 망치를 들고 텐트를 치고 한쪽에서는 배가 고프다며 벌써부터 테이블에 음식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초록 나무들 사이에 세운 텐트 안으로 들어가 누워 바깥을 내다보고 있자니 이 주말과 여행이 일주일쯤 이어질 것 같이 아득한 기분이었다. 시간은 서울에서와 다르게 매우 천천히, 천천히 흘러갔다. 솨아-하고 바람에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를 들으며 옆으로 누워 한참 동안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는... 친구들에게 보여지고 싶은 나의 모습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해방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차마 서울에 완전히 두고 오지 못한 고민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잘 자리 잡고 있는, 이제 그 안정을 누리는 것이 인생의 다음 목표인 친구들의 앞인지라 더욱 그런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조금 삐딱하고 못난 마음도 비집고 나왔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냥 얹혀온 것이었으니까. 친구들처럼 여유 부리며 차에 캠핑 장비를 싣고 주말마다 바다로, 산으로 캠핑을 다니는 생활이 나에게는 가능하지 않으니까. 이제야 틀어진 진로를 바로 잡아 시험에 다시 도전하겠다는 나의 말에 ‘이제 공부는 그만하는 게 어때’라는 말을 친구가 한지 채 한 달도 안 된 상황이었으니까. 뭐, 알고는 있다. 부모님도 내게 똑같은 말을 했었고, 그들이 진심으로 나를 걱정했기 때문에 한 말이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해가 저물자 모두들 더 즐거운 듯했다. 나 역시도 꽤 즐거웠지마는 순간순간 잡념에 빠져들었다. 부러움과, 그런 부러움에 수치심과, 걱정과, 그런 걱정의 부질없음, 즐거움과, 즐거움을 누린 대가에 대한 걱정과.. 수없이 교차되는 생각들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혹시나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들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올까 맥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을 정도였다. (친구들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던 나의 과한 욕심 때문이었다.)


그러다 문득 테이블 대각선 저 멀리 모닥불을 피우고 있는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밤이 되어 꽤 쌀쌀하기도 했고, 분위기를 깰지도 모른다는 부담감 없이 무표정으로 쉬고 싶어 혼자 자리에서 일어나 모닥불로 다가갔다.


그 앞에 앉아 2시간 정도 불을 바라보았다. 모닥불을 피운 그 사람 역시 두 시간을 아무 말 없이 빨갛게 타오르는 장작을 바라보기만 했다. 점점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러다 갑자기 “저희들, 대기업 직원은 아닐 듯하네요.”라는 말이 침묵을 깼다. “어디선가 들었는데 대기업들이 사용하는 인적성 검사에 불에 관한 내용이 있대요. 불을 지르고 싶었던 적이 있다. 불을 바라보면 편안해진다 뭐 이런 질문 같은데. 저희처럼 이러고 있는 걸 좋아한다고 적으면 여지없이 떨어진다나봐요.”라며 실없는 첫마디를 주고받았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알고 보니 정말 그 사람도 나도 단 한 번도 대기업 인적성을 쳐본 적이 없는 공무원과 공공기관 직원이었다. 마주 보고 허탈한 듯 웃다 아무런 맥락도 없이 툭, 하고는 어떤 말들이 튀어나왔다. 오늘 우리가 두고 오지 못했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차마 털어놓지 못했던 그 이야기들이었다.


딱히 대답을 들으려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걸 서로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나의 이야기가 끝나면 그의 이야기, 그의 이야기가 끝나면 나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마치 한 사람이 이야기하듯 이야기의 흐름이 이어졌다. 이상하리만치 비슷한 고민과 비슷한 생각이었다. 온전히 나를 이해하고 공감해줄 수 있는 또 다른 내 자신이 내 앞에 앉아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새벽 2시, 장작 2박스를 다 태우고 마지막 불씨가 꺼질 때까지 우린 이야기를 나눴다. 모닥불 앞에 앉은 지 5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은 ‘내가 다시 현실로 돌아가 힘이 들 때마다, 오늘의 기억을 떠올리며 힘을 낼게요.’였다.

‘오늘 대화할 수 있어 행복했다.‘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그의 손을 나는 말없이 잡았다. 나도 같은 마음이었다. 그와 대화하며 내가 얼마나 많은 위로를 받았지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서울로 돌아가는 길, 그 만성적인 가슴 시림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모닥불 앞에서 수없이 ‘따뜻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언젠가 목표하는 바를 이룬다면 분명 다시 마주치리라는 따뜻한 상상 때문일 런지도 모른다. 이상하리만치 힘이 났다. 내내 마스크를 쓴 채라 서로 얼굴도 모르면서 다시 마주치면 알아보리라는 바보 같은 믿음이 조금은 웃기기도 했다.


처음 가본 장소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과 가족과 친구들에게 털어놓지 못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운명처럼 우리가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살아갈 힘을 얻게 되는 것. 나는 이런 것들을 ‘여행지의 마법’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어제, 아무래도 여행지가 내게 마법을 부린 듯하다. 자, 이제 다시 서울이다. 곧, 월요일이다. 힘내자. 모닥불 앞에서 꺼내놓은 나의 진심이 말뿐이 되지 않도록, 약속한 곳에서 그 사람과 다시 마주칠 수 있도록 힘을 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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