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evertheless May 14. 2020

소년만화 같은 한마디.

그들은 말한다.

만화를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성장형 소년만화” 장르를 가장 좋아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올곧음"


그들의 시작은 대체로 비약하다.

그러나 끝끝내 그들은 창대하다.


실패와 좌절 / 고통과 고뇌


극복 / 성장


한계돌파 / 승리


열정과 패기 건강한 신념으로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며 악을 심판하고 선한 자를 돕는다. 이내 타인에게 귀감이 되고 타의 모범이 된다. 참 단순한 클리셰, 나이를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그런 그들을 어릴 적부터 동경해왔다. 그들은 나라는 인격체를 형성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고 영향을 주었다. 하나 지금의 내 모습은 주인공을 곤경에 빠트리고 징징거리는 주변 캐릭터가 되어가는 듯하다. 그들에게 받은 영향은 온데간데없이 무미건조한 인간으로 전락한 내 모습.


여전히 만화를 즐기지만 좀처럼 불타오르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 오랜만에 만화 같은 친구 “용”이를 만났다.



한 동네에 같이 살던 용이는 재작년을 끝으로 결혼과 함께 내게서 물리적으로 멀리 떠나갔다. 그렇다고 자주 보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이제 서로  타이밍을 맞추지 않으면 만나지 못하는 사이가 된 것은 못내 아쉽다. 그런 우리는 오랜만인 것도 잊은 채 오랜만에 술 한잔을 기울인다. 오랜만에 먹는 술은 참 쓰고 달고 맛없다.


그리곤 시간이 무르익을 쯤이면 용이는 또 그 문장을 입에 올린다.


용이는 늘 나를 칭찬하며 말한다.


“너는 멋있다.”


주절이 풀어쓰기엔 낯 뜨거워 차마 풀어쓰질 못하겠는 칭찬들. (정말 낯부끄럽다.)


심지어 그 주제가 별것도 아님에도 낯부끄럽다. 스스로 칭찬을 들을 만한 존재가 아닌데.. (하며 사는 나인데..) 그런 그는 매번의 만남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오늘은 매번 하는 그 칭찬들에 대해 정중히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자라나 그의 말을 잘랐다.


“정말로 고맙지만 칭찬하지마 나는 칭찬받을 정도로 멋지지 않아.”


.

.

.


그 말을 듣곤 녀석은 잠깐의 침묵 뒤에 잔뜩 힘을 주고 입을 벌렸다.


“나는 내가 멋지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내 친구는 당연히 다 멋있는 거야.”



(두둥)



내 회로로는 “절대로”

말할 수 없는 단어들의 조합이었다.


나는 스스로 치켜세우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치켜세운 뒤 나까지 치켜세웠다.


그것이 진심인지 아닌지, 술기운에 하는 그냥 하는 말인지 아닌지, 겉멋이 든 건지 아닌지를 생각하던 찰나에 본 그의 눈빛이 꽤나 순수하다. 10대 시절 오글거리는 만화 대사를 줄줄 읊던 그 시절의 바보 같은 눈빛이다.


순간 그 눈동자에 축 처진 내 모습이 비친다. 왜인지 웃음이 난다.


("놀고 있네")


.

.

.


"고맙다."


" :) "


오랜만에 좋아하는 만화 속 주인공들의 눈빛이 깃든 용이의 눈동자. 그 말이 오늘의 내게 스며든다.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나를 낮추느라 보지 못한 것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부모님께 항상 겸손하라고 배운 나는 어느새 겸손을 넘어 스스로를 비하하고 있었나 보다. 그 한마디에 오늘은 오랜만에 진탕 취할 때까지 술을 들이붓는다. 술을 먹으니 어릴 적 막연하게 불타오르던 자신감이 오랜만에 차오른다.


"그래 나는 졸라 멋있다."

그러나 금세 또 축 처진 나로 돌아온다.

혼자 이 행동을 분 단위로 반복하는 내 모습은 여전히 웃프다.


그래 알코올로 잡생각으로 채워진 머릿속을 희석하자. 찾아올 숙취가 두렵지만 그래도 불태우자. 하늘이 빙빙 돌고 시선이 흐려져 몸도 못 가눌 정도가 돼서야 겨우 집으로 기어들어가 하루를 마친다.



눕자마자 눈을 감고 눈을 뜨자마자 놀래서 일어난다. 숙취가 어마 무시하다. 라면이 시급하지만 오늘의 약속시간에 이미 지각이다.. 머리만 대충 감고 어제 벗어둔 옷을 그대로 다시 입고 집을 나선다. 터덜더덜 계단을 내려와 현관문을 여니 내 상태와는 달리 볓이 따사롭다. 빛이 묻은 저마다의 풍경을 흐리멍텅한 눈에 담다가 괜시레 어제 그 한마디로 또렷해진다. 오늘과 어울리는 느낌이다.  


"너는 멋있다."


다시 숨을 고른다.


그저 조금 나아졌다. 아주 조금.

하지만 이 조금으로도 조금 이나마 힘을 얻어간다.


.

.

.


삶은 치열하다.


주인공은 주인공이라는 이유 때문에 버프를 받고 고난과 역경을 넘어서지만 끈기가 부족한 나는 매번 포기하기 일쑤였다. 나의 삶은 어느새 그런 주인공의 삶과는 거리가 먼 주인공 주변의 캐릭터가 되었다. 조력자, 빌런, 엑스트라, 아무것도 모르는 시민 그 어딘가에 고여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다 보면 그 언젠가 빛을 보리라.


그들의 명대사를 머릿속으로 떠올려본다.


다시 한번 그들을 믿어보기로 한다.


지금. 오늘.

만화 같은 한마디에 또 한 번 힘을 얻어 나아간다.


한 사람을 보려면 그 사람의 친구를 보라는 공자의 말처럼 자존감은 높여주는 사람들 덕에 조금씩 나로 돌아가는 중이다.



멋있는 사람이 될 거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도 예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