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미에 대한 단상
아가미가 있으면 좋겠어.
습기를 가득 품은 대기가 숨을 버겁게 했다. 지금의 공기를 두 손에 가득 담아 무게를 재면 쇳덩이보다 무겁지 않을까, 실없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물을 잔뜩 머금은 공기가 내 몸을 짓누르는 건지, 실은 일상에 치인 내 마음이 바닥을 모르고 가라앉는 것인지 구별할 수 없었기에 그저 날씨를 탓하기로 했다.
문득 어릴 적 학교에서 단체로 견학을 간 수족관이 떠올랐다. 어둡고 파란 복도와 커다란 유리 수조 안에서 유영하던 크고 작은 물고기들. 얇고 투명한 유리 벽을 사이에 두고 우리의 코앞을 지나치며 아가미를 들썩이는 그것들의 무심함. 사실 그것들은 무심한 게 아니라 기진한 것이 아니었을까. 크지도 작지도 않은 수조 안에서 수십 개의 머리통을 스치며 아가미를 뻐끔대는, 어제와 다르지 않을 내일을 헤엄쳐내야 하는 생. 어쩌면 우리도 커다란 수조 안에 갇혀 있는 걸지도 몰라. 물속에서 호흡이 자유로운 그것들을 동경하며 숨을 들이마신다. 코로 들어오는 숨이 부족해 입을 벌려 크게 한 번 더 숨을 삼켰다. 숨 한 번에 뻐끔, 두 번에 뻐끔.
다음 인류는 아가미를 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다지도 숨이 버거울 리 없으니.
그 시절의 나는 한껏 물이 고여있는 어떤 것에 불과했다. 늘 무겁고 처져 있었으며 툭 치면 와르르 무너져 쏟아져버릴 그런 것. 당시에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한 감각들에 의해 온통 짓눌리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 감각의 근원은 일상에 대한 권태, 남들보다 도태되고 있다는 데에서 오는 초조, 나아지지 않는 현실에 대한 비관, 그런데도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자기혐오 등이었다. 다람쥐가 쳇바퀴를 굴리듯 반복되는 날들 속에서 대동소이한 일상을 되풀이하는 나, 어제와 같은 나, 발전이 없는 나. 앞으로 나아가는 주변 사람들을 보며 매일 뒤처지고 있는 내가 불만스러웠다.
타개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사장님에게 통보했다.
“더는 못 견디겠어요. 이렇게는 못 살겠어요.”
못 살겠다고 구구절절 말한 것치고 상당히 얌전한 행보였다. 당장이라도 사직서를 던지고 카드와 핸드폰, 여권만 챙긴 채 곧바로 인천공항으로 달려가기로 할 것 같은 모양새였으니 말 다 했다. 그럴 수 없었던 첫 번째 이유는 당장 다음 달에 갚아야 할 카드값이었으며, 두 번째 이유는 매달 착실하게 통장에서 자동 출금되는 전세 이자였다. 추석과 이어 붙여 최대한 길게 휴가를 쓰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탈이었다. 로또 1등에 당첨되면 짓눌린 숨이 트이지 않을까, 꽤 타당한 생각에 고개를 깊게 끄덕였다.
사람이 많지 않은 작은 회사였으나, 사장님은 흔쾌히 일주일 가량 자리를 비우는 것을 허락했다. 다른 이들에게 가중된 업무들은 복귀 후 성실히 일해 갚으면 될 일이었다.
그래서 휴가는 어디로 갈지 정했어요?
아니요. 어쨌든 더는 여기 못 있겠어요.
단호한 내 말에 사장님은 크게 웃었던 것 같다. 재밌으라고 한 말로 들렸을지 모르나, 저 대답에 거짓이라고는 단 한 톨도 담겨있지 않았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스스로 구해낸 것이었다. 그 용기가 못내 기특했다.
이제 결정해야 하는 것은 ‘어디로 떠날 것이냐?’였다. 행선지는 정해지지 않았으나 그에 대한 조건은 확고했다. 첫째는 바다가 있을 것, 둘째는 온몸이 새카맣게 타도 좋으니 햇볕이 내리쬐는 따뜻한 곳일 것, 마지막으로 해외일 것. 습해서 춥고 눅눅해져 무거운 한국을 떠나 여름 뙤약볕에 몸을 데우고, 그러다 너무 뜨거우면 바다로 뛰어들고, 까매진 얼굴을 한 채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밤마다 맥주를 마시고 싶었다.
조건이 명확하니 후보지를 간추리는 것은 금방이었다. 최종적으로 남은 후보지는 두 군데였는데, 사이판과 괌이었다. 그중에서 괌을 선택한 것은 매일 점심 메뉴를 고르는 것만큼이나 충동적이고 별 이유가 없었다. 바다가 지겨우면 쇼핑하면 되지 않을까, 라는 아주 간단한 이유였다. 괌에 가고 나서야 나는 그 생각이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괌에서 보낸 일주일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바다가 질린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