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인식
수 만 명을 동시에 수용가능한 야구 구장에 모든 관중이 야구를 관람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여기서 야구는 "객관적 사실(사건) 혹은 본질"을 의미한다.
관중 개개인은 "우주를 탐구하고 살아가는 인간 개개인"을 의미한다.
야구라는 객관적 사건이 분명히 수많은 관중의 눈앞에 진행 중 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객관적 사실을 바라보는 좌석에 따라 각 관중들은 어느 누구도 동일한 관점을 가지지 못한다.
또한, 각 개인의 개인 관심사에 따라 주목하는 구체적 대상이 상이하다.(타자, 포수, 투수 등등)
그러므로, 동일한 객관적 사실을 관찰하는 어느 누구도 '야구'라는 총괄적 개념으로서의 객관적 사실 자체를 인지할 수 없다.
그 원인을 생각해 보면, 어느 누구도 같은 좌석에 2명 이상이 앉을 수 없다는 점, 한 순간에 집중가능한 대상(공간)은 하나인 점에 기인하고,
즉, 시공간의 존재 자체는 인간이 주관적 인식만을 가능토록 하는 제한을 부여한다.
그렇다면, 그 사건의 직접적 감각적 인지가 없는 야구장 밖에 있는 사람인 경우는 어떠한가?
오로지, 직접 경험한 사람의 말로만 야구장 안에 야구경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을 수 있다. 야구라는 사실이 야구장 안에서 일어날 수 있음을 단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만일 이러한 이의 숫자가 야구장 안에서 야구를 관람한 관중의 수에 비해 비할 수 없이 많다면, 어찌 되겠는가?
야구장 안에 야구경기는 있었는가? 아니면 처음부터 없었는가?
알 수 없을 것이다. 오로지 야구 경기가 있었음에 대한 확신은 직접 체험뿐이며, 이 또한 다른 사람의 그 체험과 정확히 같을 수는 없다.
같은 사건(동일 신)이지만, 다른 체험(다른 신) 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야구’를 진리(종교)에 관한 사실 혹은 사건, 야구장 안 관중은 진리(신)에 대한 직접체험이 있는 신도 혹은 인간, 야구장 밖 관중은 위 직접 체험과 신념이 없는 인간으로 생각해도 무방하다.
다만, 주목할 것은.. 영상매체의 발달로 동일 야구 경기를 TV를 통해 전 세계 관중이 시청이 가능하다. 이때, 모든 TV로 야구를 보는 시청자들은 같은 관점 및 같은 해설의 같은 체험을 통해 야구를 접하게 된다.
즉, 앞서 말한 시공간의 제한이 점점 극복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둘’에서 ‘하나’되어 감의 예시이다.
'나'와 (진정한 의미에서의) '앎'은 양립불가능한 개념이다. " 내가 ~을 안다."라고 하자마자, 그 명제는 틀린 것이 되고 만다.
상기에서 언급한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시공간의 제한과 '나'라는 자아의 개념은 밀접분가분의 관계이다. 그리고, 진정한 '앎'은 객관적 사실 자체를 앎을 의미하는 것이지, 객관적 사실을 주관적 관점에 의해 인식된 일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