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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틀풋 Aug 08. 2023

수술 5개월 후 모로코에 가는 사람(2)

페즈 쉐프샤우엔을 거쳐 다시 라바트로

우리는 사하라 사막의 별들 아래 베이스캠프에서 무사히 1박을 했다.

막사처럼 생긴 곳이 여러 개 있고 그 안에 침대가 2~3개씩 있는데, 사막의 밤은 춥기 때문에 이불이 4겹씩 준비되어있다. 나는 이만큼의 이불로도 자다가 추울 것을 알기에 미리 챙겨 온 침낭에 들어가 그 위에 또 이불을 덮고 잠을 청했고 그래도 조금 춥긴 했지만 괜찮은 잠을 잘 수 있었다. 나는 워낙 추위에 취약한 편이라 여행 전 H에게도 침낭을 꼭 챙겨 오라며 호들갑을 떨었는데 사막 이외의 숙소에서도 모두 침낭을 사용했던 나와는 달리, H는 그럭저럭 지낼만하다며 새로 산 침낭을 단 한 번도 쓰지 않았고 비닐도 뜯지 않은 상태 그대로 영국에 가져가서 환불했다고 했다. 역시. 아픈 사람들이 보부상으로 성장하는 데에는 이렇듯 나름의 이유가 있다.


사하라에서 마을로 돌아온 후 우리는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페즈(Fes)로 출발했다. 9천 개의 미로 같은 골목들을 품고 있어 구글맵도 무용지물이라는 페즈. 그 자체로도 나의 모험심을 자극하는 도시였지만 길지 않은 일정 상 페즈에는 저녁에 도착해 1박을 한 후 바로 쉐프샤우엔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페즈로 이동하는 중간에 들른 식당에서 우리에게 고기 나눔을 요청하러 온 고양이. 모로코는 고양이 천국이다.

<스머프 마을 쉐프샤우엔(Chefchaouen)> 

긴 이동 끝에 도착한 쉐프샤우엔. 거의 이틀에 한 번 꼴로 몇 시간씩 이동을 하는데도 여행 자체가 즐거워서 그런지 여행 중에는 크게 힘들다고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육신의 의견도 들어봐야 할 일이었다. 여행 끝나고 몇 주 동안 아팠던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쓰겠다) 마을에 진입하기 저 너머부터 온통 파란 벽으로 칠해진 마을이 보이는데 어찌 신나지 않겠는가!


마치 스머프 마을처럼 골목을 온통 파랗고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았다. 벽에 그려놓은 그림들은 또 얼마나 예쁜지!


숨겨진 예쁜 골목을 찾아내는 미션은 그 자체로도 아주 재밌었다. 나는 사하라 사막에서 어린왕자를 상상하듯, 이런 골목들을 바라보며 몇 백 년 전 사람들이 여기서 물건을 사고, 뛰어놀고,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었을 장면을 상상하며 즐거워한다 (그렇다, 나는 진정한 변태이다). 긴 세월 동안 넉넉히 사람들을 품어 온 지구 반대편의 도시에 내가 서 있다니. 짜릿하다.


모로코는 과일이 달고 맛있기로 유명해서 길에서 과일을 직접 착즙해 주스로 팔고 있는 가게가 많은데, 쉐프샤우엔은 특히 이런 가게가 많았다. 과일 좋아하는 H와 나는 아보카도, 석류, 오렌지 등 주스 가게가 보일 때마다 열심히 주스를 사 마셨다. 특히 오렌지는 당도가 높고 정말 맛있어서 이때 오렌지 주스의 매력에 처음으로 푹 빠져 한국에 귀국하고 나서도 몇 달을 오렌지 주스에 빠져 살았다. 다만, 추적 검진을 위해 찾은 유방외과 의사 선생님이 시중에 파는 오렌지 주스는 설탕 덩어리라 몸에 좋을게 없으니 되도록이면 먹지 말라고 하신 건 안 비밀..   

과일을 고르면 그 자리에서 직접 착즙해 주는 주스 가게. 과일을 사랑하는 나에겐 천국이었다.


<의외의 행복, 라바트(Rabat)>

어떡하지. 모로코 여행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단 말이다. 우리는 이튿날 귀국하기 위해 기차로 부랴부랴 수도 라바트로 돌아왔다.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H는 영국으로,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일정이다. 우리는 마지막 밤은 남은 돈을 다 털어 맛있는 것을 먹어보자고 스페인 요리가 있는 식당으로 가서 저녁을 맛있게 먹고 오는 길에 또 주스를 사 먹으며 숙소로 돌아왔다. 


아쉬운 귀국 날, 우리는 모두 오후 시간 항공편을 예매했기 때문에 오전 시간은 느지막이 거리 산책을 하기로 했다. 7일 전, 처음 라바트에 도착했을 때는 깜깜한 밤이었고 다음 날 아침에 바로 마라케시로 이동하는 바람에 라바트를 충분히 즐길 시간이 없었다. 게다가 그간 꽤나 타이트한 일정을 소화하느라 여유 부려 볼 날이 단 하루도 없었기 때문에 마지막 날만은 계획 없이 느슨하게 시간을 보내다 공항을 가고 싶었다.


우리는 거창한 계획 없이 숙소 근처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에 있는 바닷가를 산책했다. 여기가 대서양이다! 바닷가에서 노래도 부르고 수다도 떨며 갈매기들을 구경하고 다시 마을 쪽으로 천천히 걸으며 산책을 했다. 신기한 것은 그 동안 각 도시들 저마다의 독특한 매력을 느끼는 것도 물론 즐거웠지만, 여행 후 H와 내가 꼽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의외로 특별할 것 없던 마지막 날의 라바트 산책이었다는 점이다. 


그동안 꽤나 타이트한 일정 속에서 장거리 이동을 하며 자각하지는 못해도 분명 몸과 마음이 바짝 긴장을 했었을 텐데, 무사히 그리고 안전하게 모든 일정을 클리어했다는 안도감이 들어서였을까. 우리는 발길 닿는 대로 걷고 그러다 배가 고파지면 카페에 들어가 빵과 오렌지 주스를 먹으며 여유를 즐기다 함께 공항으로 향했다. 

(좌)모로코의 오렌지 주스 중독자 (우)서울에 테레란로가 있는 것처럼, 라바트에는 도쿄로가 있었다.



암 환자가 되어 떠난 모로코 여행. 일정 도중 크게 체력적으로 힘들다 느끼지 않고, 환자 신분에 걸맞게 꼬박꼬박 약도 잘 챙겨 먹고, 아프지 않고, 그 와중에 가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도 다 챙기고. 이 정도면 환자 치고는 제법 훌륭한 여행을 해낸 것이 아닌가. 이제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완벽하다. H와 공항에서 인사를 하고 헤어진 여행의 끝자락, 이때만 해도 또다시 예기치 못한 변화구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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