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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딸기체리수박 Jun 05. 2022

그녀를 회사에서 내보내야 한다.

[글쓰기 좋은 질문 642] 그중 12번째


이번 주 월요일.


“강대리, 무슨 일이야? 회의실까지 불러내고?”

“팀장님... 따로 드릴 말씀이 있어서...”

“어. 편하게 얘기해. 무슨 일인데? 혹시 퇴사? 아니지?”


퇴사 얘기는 아니었다. 다만 누군가를 퇴사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아... 지난주에 입사한 파견직 박주희 씨... 얘긴데요...”

“응. 박주희 씨. 싹싹하다던데? 잘하고 있지?”


박주희. 회사에서의 박주희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녀는 일주일 동안 꽤 자연스럽게 회사에 적응했고, 일도 꽤 잘했다. 물론 파견직에게 주어지는 일이 단순하고 반복적인 업무들 뿐이었지만, 어쨌든 그 일들을 잘 해내고 있었다. 그래서 지난 금요일까지만 해도 내가 그녀의 퇴사를 원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근데   이상 박주희를 회사에서 보고 싶지 않다. 아니. 그 어디에서도 보고 싶지 않다.


“아, 팀장님... 그게 박주희 씨가 회사를 그만 나와야 할 것 같아서...”

“다른 회사 간대? 퇴사한대?”

“아뇨. 그건 아닌데 해고해야 할 거 같아서...”


해고라는 말에 팀장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파견직과 계약직들이 함께 노조를 결성하느니 마느니 어지러운 시기였다. 회사에서는 '초과근무 수당을 줄 수 없으니, 초과 근무는 계약직과 파견직에게는 절대 시키지 말고, 정규직에게만 시켜야 한다.'는 내용의 공문을 뿌려댔다. 이런 예민한 시기에 파견직 해고라니. 팀장님이 당황스러워할 만했다.


또, 누군가를 해고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파견직이든 계약직이든 횡령 정도는 해야 해고시킬 수 있었다. 단순히 일을 못한다고 해서 해고시킬 수도 없었고, 심지어 박주희는 일도 꽤 잘했다. 분명 해고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일이었다.


역시, 팀장님의 답변은 예상대로였다.


“박주희를 왜 해고시켜? 강대리 처음에 박주희 씨 엄청 뽑고 싶어 했잖아.”

“죄송합니다. 제가 더 잘 알아봤어야 하는데, 박주희 씨 이력서 기재 내용 확인해봤는데, 박주희 씨가 한국대 출신이 아니더라고요."

“그래? 그럼 이력서에 나온 건 가짜라는 거야? 하긴... 한국대 나온 애가 여기 파견직을 뭐하러 다니겠어."

"파견 업체에서 제대로 확인을 못한 거 같더라고요. 이건 문서 위조니까 제가 해고 절차 진행해도 될까요?"


그나마 박주희의 이력서에 꼬투리를 잡을 건덕지가 있는 건 다행이었지만, 팀장은 뭔가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다.


"강대리, 근데 원래 파견업체가 보낸 이력서 내용 자체는 우리가 다시 확인 안 하잖아. 그걸 왜 확인해봤는데?"



한 달 전


박주희. 그녀를 만난 것은 한 달 전쯤. 휴가를 내고 찾았던 양평의 한 식당에서였다. 우린 둘 다 혼자였고, 2인분부터 주문 가능하다는 매운탕을 먹기 위해 합석을 한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렇게 우연히 매운탕을 함께 먹었고 매운탕이 맛있어서인지 뭔지 우린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아, 그럼 주희 씨는 지금 회사 휴가 낸 게 아니라 그만둔 거예요?”

“네. 회사에 이상한 사람이 너무 많았거든요. 막상 걱정이 되긴 하지만, 뭐... 계약 만료로 그만두면 실업급여라도 나왔을 텐데. 전 제가 그만둔 거라서 지금까지 벌어둔 돈만 축내고 있어요.”


매운탕과 함께 한두 잔 홀짝거린 소주 때문인지, 아니면 매운탕을 함께 먹는 데에서 운명 비슷한 것을 느낀 건지, 박주희 씨가 조금 예뻤던 탓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난 인사담당자로서 해 본 적 없는 짓을 하게 되었다.


“주희 씨. 그럼 우리 회사 지금 파견직 뽑고 있는데, 그거 지원해요. 계약 기간 6개월인데, 다니다가 계약 끝나면 실업급여도 받으시고...”

“넣었는데 떨어지면요?”

“어차피 파견직은 뭐 복잡한 절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 파견 업체 공고 링크 보내줄 테니까 거기 지원해요. 파견직 정도는 회사로 서류 넘어오면 제가 어느 정도 손 쓸 수 있어요.”


내 말에 박주희는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소주를 몇 잔 더 홀짝거리다가 음주 운전을 할 수 없다는 핑계로 우린 어떤 모텔에 들어갔고, 그렇게 그날부터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박주희는 정말 파견직에 지원한다며 나에게 이력서를 보냈다.


“오빠, 나 이렇게 이력서 보낼 건데, 어때요?”


이력서를 보니, 그녀는 나와 같은 한국대를 나온 후배였다. 한국대를 나온 것 치고는 운이 좋지 않았는지 그다지 좋은 회사들을 다니지는 못했지만, 파견직에 이 정도 스펙이면 충분했다.


“이렇게 지원서 제출해. 잘 썼네. 근데 한국대 나왔네?”


운명적으로 매운탕을 함께 먹은 것도 모자라 같은 대학을 나왔다는 공감대까지 형성한 우리는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러다 일주일 전, 박주희는 우리 회사 파견직으로 입사했다. 이 과정 중에 내 입김이 꽤 작용했던 건 사실이다. 우리 팀장은 ‘한국대 애를 뽑아서 파견직을 시켜두면 기간 못 채우고 퇴사한다.’며 끝까지 박주희 채용을 반대했다.


“팀장님, 그래도 이렇게 변변한 이력 하나 없으면, 오히려 조직 충성도가 높을 수가 있어요.”


난 끝까지 그녀의 입장을 대변했고, 결국 그녀가 나와 같은 회사를 다니게 된 것이었다.  



다시, 이번 주 월요일


"강대리, 왜 확인했냐고."


어떻게 알았냐고?


솔직하게 말할 순 없었다. 그녀가 한국대를 다니지 않는다는 것은 그녀의 집에서 처음 알게 되었으니까.


엊그제. 그러니까 지난주 토요일. 난 박주희와 축하 파티를 하고 싶었다. 어쨌든 같은 회사를 다니게 되었고, 첫 주를 성공적으로 끝냈으니까.


“주희야, 오늘 저녁에 뭐해?”

“나? 저녁에는 잠깐 부모님 댁에 갔다가 올 거 같은데? 저녁 같이 먹으려고. 왜?”

“아, 그럼 부모님네서 자?”

“아니? 밤에는 집에 갈라고.”

“아, 그럼 일요일에 보자.”


일요일에 보자고는 했지만, 난 그대로 장을 봐서 주희네 집으로 갔다. 저녁은 먹고 올 테니 간단하게 와인과 안주를 준비해서 파티를 하면 되겠거니. 한 번 가본 적은 있어서 찾는 게 어렵진 않았다. 그리고 비밀번호는...나랑 만난 날로 바꿨다고 했으니...그냥 이렇게 들어가면 되는 거였다.


근데...

주희 집은 주희 집이 아니었다. 내가 지난번에 왔던 주희네 집이 아니었다. 그 작은 원룸 온 벽면은 내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나랑 사귀면서 찍은 사진들만 붙어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주희를 알기도 전의 사진부터 내가 다른 여자친구를 사귈 때의 사진까지... 나도 몰랐던 내 사진들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이 작은 원룸에 이렇게 많은 사진이 다닥다닥 붙을 수 있다니, 그것보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이런 사진이 없었는데...


책상에는 글씨가 빼곡한 노트가 널브러져 있었다. 스치듯 노트에 내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강성훈 29세


한국대 경영학과 13학번->같은 학교 출신 후배를 아끼는 편. 한국대 분교 출신을 좋아하지 않음(중요). 꼭 한국대 본교 출신이라고 말하기


21년 12월에 민정이라는 여자와 헤어짐. 민정이라는 여자 인스타에는 명품 자랑이 많은 것 같음. 애정 결핍이 있어 보임.(중요)->연락에 집착하지 않고, 주말에도 꼭 만나야 한다고 보채지 않기


좋아하는 여자 연예인 : 수지, 전지현(긴 생머리, 하얀 얼굴, 청순한 스타일, 화장이 진한 사람은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음.)


당근 주요 거래 물품 : 전자제품, 남자 스포츠 웨어 등


만날 수 있는 장소

1. 3월 첫째주 금요일에 휴가 내고 양평에 혼자 놀러 갈 예정-매운탕 먹을 예정이라고 함. 매운탕 집에서 만나서 매운탕 같이 먹기(매운탕집은 2인분 이상을 판매)

2. 잠실 근처에서 테니스 동호회 찾아보는 중. 테니스 동호회 정해지는 대로 따라 가입하기

3. 얼마 전 당근에 아이패드 중고거래 올려뒀다가 숨김 처리한 것으로 보임. 거래가 다시 뜨면 거래하면서 만나기

4. 재직 중인 회사에 파견직 공고 나와 있음.


내가 언제 SNS에 올렸는지 기억도 안 나는 것들까지 모조리 정리되어 있었다. 도대체 내 당근 계정은 어떻게 알아냈지? 날 도대체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거지? 매운탕을 먹은 것도 다 우연이 아니었던건가?


누군가가 날 이렇게 감시하고 있을 거라곤... 그것도 사귄 지 한 달이 되어가는 여자친구가 사실은 나를 이렇게 감시하고 있었다니. 심지어 파견직 공고가 나온 것까지 다 알고 있었다니.


몸이 얼어붙었다. 어쩌면 내가 이 집에 들어온 것을 어디에선가 지켜보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대로 난 그 집을 빠져나왔고, 집에 가는 길에 속이 울렁거려 토까지 했다. 한국대 교직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동기에게 부탁해서 박주희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조회해달라고 했고, 정말 박주희는 한국대 학생이 아니었다.


난 이렇게 박주희가 한국대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냈다. 이 이야기를 팀장에게 솔직하게 할 순 없었다.


“아...팀장님 그게 한국대 후배라고 하고 나이도 비슷해서... 주변 친구들에게 물어봤더니 아는 사람도 없고... 그래서 오늘 혹시나 해서 학력조회 요청했거든요.”

“그럼 어느 학굔데?”

“그건 저도 모르지만...”


팀장의 표정은 여전히 의심스러웠다.


“강대리. 이번 한 번은 강대리가 하려는 대로 해. 법과 절차에 맞게. 어쨌든 그 사람이 학교 속인 건 맞고, 애초에 서류 검증은 파견업체에서 하는 게 맞는 건데, 그쪽에도 상황 전달 제대로 하고. 근데 더 말해야 하는 게 있으면 꼭 말하고. 알겠지?”


나를 쳐다보는 팀장의 눈빛은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팀장님이 회의실을 나가고, 난 박주희를 불렀다.


“네, 대리님!”

“박주희씨. 먼저 구두로 말씀드리는데, 박주희 해고 절차 진행될 예정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로 정리해서 메일로 보내드릴 거고요.”

“네?”


박주희는 혹시 내가 장난을 치는 건지 내 눈치를 살폈다.


“박주희씨, 한국대 출신 아니시죠? 서류 기재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메일 통해서 확인하세요.”


내 말을 들은 박주희의 표정은 싸늘하게 변했다. 그녀의 변한 표정을 보는데, 마치 내 사진이 가득한 그 방에 다시 들어가 있는 기분이 들었다.


"오빠, 그걸 어떻게 알았어? 나 한국대 아니라서 주말 동안 연락 안 받았던 거야? 혹시 우리 집에 왔었어? 그래도 되는 거야?"



당근을 통해 글쓰기 모임을 모집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일곱 분 정도가 모여서, 글쓰기 좋은 주제 642 라는 책에서, 원하는 주제를 골라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번 주 제가 고른 주제는

<한 여인이 채용된 지 일주일 만에 해고당하는 장면을 글로 써보라. 참고로 지금 이 여자를 해고하려는 사람은 일주일 전만 해도 그녀의 채용에 아주 적극적이었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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