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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딸기체리수박 Jul 17. 2022

대기업 8년 차 돌싱 과장의 연애

글쓰기 좋은 질문 642 중 125번째

 얼마 전, 난 8년 가까이 다닌 회사를 떠나 좀 작은 회사로 자리를 옮겼다. 작은 회사에 오는 대신 연봉과 직급이 올랐고, 난 서른 살에(빠른년생임을 감안하면 서른한 살이지만) 어떤 스타트업의 팀장이 될 수 있었다. 뭐, 나쁘지 않았지만 오래 다니던 회사를 이렇게 퇴사한 게 좀 서운하고 씁쓸했다.


 회사엔 내가 어떤 대학생 인턴과 불륜을 했다는 소문이 났다. 곧 그 소문이 잠잠해지긴 했지만, 소문에 시달리던 며칠 동안 난 회사가 참 싫어졌다. 어차피 이 정도면 꽤 오래 다녔다 싶었고, 그냥 퇴사를 선택했다.


 그러다 내가 퇴사하고 얼마 뒤, 정차장이 나에게 이런 문자를 했다.

 '김 과장님, 정말 미안해요. 내가 그 학생이랑 김 과장 같이 있는 걸 보고, 둘이 가까워 보인다고... 딱 그 말만 했는데 그게 그렇게 소문이 나서... 정말 미안합니다.'


 이제 와서 뭐 어쩌자고 이런 문자를 보낸 건지. 그것보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난 나에 대한 그 추잡한 소문의 근원지가 그 '어떤 대학생 인턴' 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를 거의 벌레 취급했다. 그러는 게 아니었는데... 그와 처음 사적인 대화를 나눈 건, 몇 달 전 여름이었다.




 그날, 나는 퇴근하고 집에서 넷플릭스로 연애의 참견을 보면서 야채곱창을 시켜 먹을 계획이었다. 금요일 퇴근길에 걸맞은 완벽한 계획이었다. 


 '아, 여기 배달비 겁나 올랐네... 그냥 픽업해갈까? 너무 더운데... 아...'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야채곱창을 먹으려면 지금 쯤 주문을 넣어놔야 했고, 난 배달 팁과 리뷰를 보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날 부르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과장님! 과장님!"


 날 부르는 대학생 인턴이 내 바로 옆까지 와서야, 그 소리를 인지할 수 있었다. 우리 회사는 두 달이 조금 넘는 여름 방학 기간 동안 일할 대학생 인턴을 채용했다. 일이라고 해봐야, 회사가 어떤 일을 하는지 배우고 홍보 이벤트 하고, 각종 행사에 동원되는 것들 뿐이었지만 그것도 경쟁률이 300:1이 넘었단다.


 그렇게 뽑은 대학생 인턴은 소속 부서 상관없이 4~5명이 한 조가 되었고, 조별로 정규직 멘토 직원 한 명씩을 배정했다. 난 이 회사 과장 중에 제일 나이가 어린 탓에 5조의 멘토 역할을 하고 있었다. 멘토라고 해봐야 일주일에 한 번 만나서 식사하고, 이것저것 조언해주는 것이 다였지만 보고서도 내고 귀찮은 일이 꽤 많았다.


나 - 아, 원준 학생. 지금 퇴근하세요?

원준 - 네, 과장님도 퇴근하세요?

나 - 네. 요즘 뭐 일은 괜찮아요?

원준 - 아, 과장님이 많이 알려주셔서 덕분에 잘 적응한 것 같아요.


 녀석. 말 뿐인 인사라도 기분이 살짝 좋긴 했다. 


나 - 아, 내가 무슨 한 일이 있나요. 뭘.

원준 - 과장님, 근데 혹시 저 저녁 사주실 수 있나요? 약속 있으세요?

나 - 저녁이요? 저랑 둘이? 안 불편하세요?


 의외였다. 어쨌든 난 이 회사 과장이고 일종의 상사 아닌가? 이런 나랑 둘이 식사, 그것도 퇴근 후 저녁 식사를 하는 게 안 불편한가? 아니면 예의상 하는 제안인가?


원준 - 불편하긴요, 궁금한 것들도 많고 그래서 식사하면서 여쭤보고 싶어서요!


 원준의 속내가 뭔지는 몰랐지만, 확실한 건 사회생활에 굉장히 적극적인 학생이라는 사실이었다. 어쨌든 그 모습이 귀엽고 좋아 보여서, 난 그렇게 그날 원준과 저녁을 먹기로 했다. 


 원준은 적당히 사람이 붐비는, 적당한 가격의 식당으로 날 인도했다. 난 '좀 더 비싼 거 드셔도 되는데.'라는 마음에 없는 소리를 했다. 


나 - 근데 우리 회사 뭐가 궁금해요? 

원준 - 회사 얘기는 아니고... 과장님, 과장님 결혼하셨다면서요?


 결혼이라니. 순간 목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그래. 결혼을 하긴 했지.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가 결혼한 것으로 알고 있긴 하지만, 난 사실 1년 전쯤에 이혼했다. 회사에서는 이 사실을 잘 모른다. 아니, 아마 알 수도 있다. 내가 신혼인 것 치고는 통 결혼생활 얘기를 하지 않으니까. 


나 - 아... 예... 결혼했어요. 그게 궁금했어요?

원준 - 사실 저는 처음에 과장님 20대 신줄 알았어요. 그리고 개발팀에 이민국. 그 형이 과장님 남자친구 없다고 했었거든요.

나 - (대기업에서 20대가 어떻게 벌써 과장을 하니...?) 아 그래요? 그분이 입사하기 전에 결혼해서... 몰랐나 보네요. 둘이 어떻게 알아요?

원준 - 학교 선배예요.


 나는 가급적 이 이야기를 여기서 마무리하고 싶었다. 도대체 왜 원준 학생이 내 결혼 여부를 질문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불편한 이야기임에는 틀림없었다. 하지만 원준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원준 - 전 그래서 과장님 남자친구 없으신 줄 알았는데, 어제 동기들이랑 회식하는데 과장님 결혼하셨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과장님 언제 결혼하셨어요? 아직 서른밖에 안 되셨잖아요.


 그는 이 질문을 시작으로 내 결혼에 대한 궁금증을 쏟아냈다. 적당히 아무 대답이나 해줄까, 하다가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나 - 어... 원준학생. 근데 제가 사실 지금 이혼했어요. 회사에서는 몰라요. 어차피 원준학생도 한 달쯤 있으면 인턴 끝나니까... 그리고 뭐 어디다 이런 거 말할 사람 같지도 않고... 계속 질문을 하니까 당황스러워서... 


 막상 말하니까 괜히 말했다 싶기도 했지만, 저 대답 덕에 원준이는 더 이상 내게 결혼과 관련된 질문을 하지 않았다. 내 답변 때문에 분위기가 어색해질까 싶었지만, 의외로 우린 웃고 떠들며 재밌는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그때부터 원준이는 조금 달라졌다. 나도 모르는 새에 내 자리에 음료수를 두고 간다거나, 개인적인 연락이 오는 날이 많아졌다. 첫 월급이 나온 다음에는 감사하다며 목걸이를 선물하기도 했다. 인턴들이 첫 월급을 받고 멘토에게 가벼운 선물을 주는 일은 예전부터 간혹 있었다. 근데 목걸이를 선물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게다가 이 목걸이 가격은 26만 원이었다. 


 아무리 이혼으로 연애 세포가 죽었다고 해도, 이 정도 시그널을 못 알아차릴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김원준, 얘 사회생활 꽤 잘하는 애 같은데 내가 이 회사 과장이니까 일부러 접근하는 건가? 뭐 하나 빼먹을 게 있나 하고? 내가 이혼했다고 하니까 이제 쉬워 보여서 이러나? 아, 근데 내가 이걸 왜 생각하고 있는 거지? 나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대학생이 이러면 그냥 그러지 말라고 철벽 치면 끝날 일인데?


 이상하게 김원준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난 그에게 목걸이를 돌려줬고 사적인 연락을 자제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그 뒤로 나에게 사적인 연락을 하지 않았고, 그게 안심이 되면서도 뭔가 서운했다. 그렇게 난 그에게는 그저 5조의 멘토로 여름을 보냈다.


 그러다 그에게 다시 연락이 온 건 9월쯤이었다. 


원준 - 과장님, 안녕하세요. 저 김원준인데, 통화 괜찮으세요?

나 - 아...네. 잘 지냈어요?

원준 - 제가 인턴 할 때 과장님 너무 부담스럽게 해 드렸죠. 죄송합니다.

나 - 아... 아니에요. 원준학생도 제가 괜히 그래서 불편했죠.

원준 - 과장님, 저 한 번만 만나주실 수 있으세요? 드릴 게 있어서. 퇴근 시간 맞춰서 제가 가져다 드릴 수도 있는데.


 거절을 해야 하는데, 난 바보처럼 이번에는 뭘 주려고 하는 건지 궁금했고, 만나서 너무 비싼 물건이면 안 받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곤 그를 회사가 아닌 집 근처 카페에서 한 번 더 보기로 했다.


 의외로 원준이가 내게 준 물건은 책이었다. 제목은 '김현수 과장님' 이었다. 내 이름으로 된 책이 있었다니, 순간 웃음이 터졌다.


나 - 아, 제 이름으로 된 책이 있었네요? 몰랐어요. 

원준 - 과장님, 이거 제가 쓴 거예요. 인턴 할 때 개발자 선배들이 개발자도 글을 잘 쓰면 좋다고 해서... 몇 달 동안 글쓰기 수업 들었거든요. 그러다 얼마 전에 끝났는데... 이게... 아... 제가 글을 잘 쓰던 사람이 아니라 이상하긴 할 텐데... 그냥 


 난 어안이 벙벙한 채로 앉은자리에서 그가 써준 책을 다 읽었다. 책이라고 해봐야 100페이지 내외였고, 줄 간 간격도 꽤 커서 읽는 데에 시간이 많이 걸리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의 말대로 정말 글쓰기 실력이 좋지 않아서 그냥 일기를 훔쳐보는 느낌이었다.


 '이 사람 뭐지? 같이 얘기를 하는 데 왜 이렇게 재미있지? 왜 이렇게 좋지? 민국이 형 말로는 남자 친구가 없다고 했지만 나 같은 대학생이 남자로 보이기는 할까?'

 '그런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과장님은 남자친구는 없지만 남편은 있는 사람이었다.'

 '과장님이 결혼했던 건 맞는데 이혼했다고 한다. 적어도 나한테 시도해볼 수 있는 기회는 생긴 거다.'

 '처음에는 이 정도로 이뻐 보이진 않았는데, 이제는 너무 예뻐 보인다.'


 그 꾸밈없는 글이 왜 그리도 좋았는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 글이 너무 좋아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원준 학생에게 마음이 열렸다. 내가 대외적으로는 결혼한 여자라는 것, 실제로는 내가 이혼한 여자라는 것 모두 마음에 걸렸지만... 


 그와 만나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다른 사람은 몰라야 했다. 사람들은 내가 아직도 다른 누군가와 결혼한 상태인 것으로 알고 있으니까.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이제 원준의 인턴 기간도 끝났고 별 탈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얼마 뒤 회사에 그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대학생 인턴이랑 바람이 났다는...불륜을 한다는 소문. 그 소문이 내 귀까지 들어오는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고, 난 그 순간부터 원준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이 어린 놈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그렇게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민국인가 뭔가 하는 그 선배라는 새끼한테는 말했겠지. 회사가 이렇게 소문이 빨리 퍼지는 곳인데... 대학생이 뭘 알았겠어. 아 진짜 그렇게 이혼을 하고도 또 남자를 믿은 내가 병신이지.' 


 원준이는 나와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난 믿지 않았다. 끝까지 아니라고 믿어달라는 그의 마음을 너덜너덜하게 만들었다. 모질게 화를 퍼붓고 얼마 뒤 회사를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정차장이 갑자기 미안하다고 문자를 보낸 것이다. 갑자기 그 문자를 보는 순간 정신이 번뜩 들었다. 나에 대한 책을 만들 정도로 순수했던 사람이었는데... 


 사과를 하고 싶어도 그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새 번호를 바꾼 것 같았다. 난 그를 찾아보기로 했다


당근을 통해 글쓰기 모임을 모집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일곱 분 정도가 모여서, 글쓰기 좋은 주제 642라는 책에서, 원하는 주제를 골라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번 주 제가 고른 주제는 <당신은 과거의 남자 친구 혹은 여자 친구를 추적하고 있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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