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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물꽃 Apr 01. 2024

소설_08

맨틀을 깨자!

피드백 시간에 탈탈 털렸다!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이야기를 보여주려고 했건만 별로 더럽지 않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사람들이 이거 읽고서 나를 정신 나간 사람으로 보면 어쩌나 겁먹었던 게 부끄러울 정도였다. 차라리 너무 지나쳤다는 반응이 낫지 약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솔직히 혼란스러웠다. 나로서는 꽤 많이 도전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계를 깬다는 게 참 어렵다. 지금의 상황을 두고 딱 떠오른 경험이 있었다. 바로 작년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바닷가에서 비키니를 입는 일이었다. 나한테 그건 큰 도전이었다. 아무리 더워도 나시 한번 입고 나간 적이 없다. 누가 뭐라고 한 적도 없는데 노출한다는 게 왠지 부끄러웠다. 뭐 그럼 꽁꽁 싸매는 게 취향이라 할 수도 있지만 속으로는 그런 시원한 차림을 한번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버킷리스트라는 명목으로 그런 거대 노출을 무슨 도전처럼 남겨놨었다.


버킷리스트를 실현한 건 여름의 끝자락이었는데 해수욕장도 모두 폐장한 시즌이었다. 바다에 도착했을 때 비키니는커녕 수영하러 앉아있는 사람조차 없었다. 허허벌판의 모래사장에 도착했을 때 살짝 고민했다. 이미 원피스 안에 비키니를 모두 챙겨 입고는 나왔지만 여기서 벗었다가 누가 변태라고 신고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사실 바다에서 수영복 입는 게 나름 tpo 맞는 복장인데요 혼자 겁먹었다. 그런 생각과 버킷리스트를 꼭 성공하고 싶다는 욕망이 부딪혀 결국 성공한 건 후자였다. 나는 아주 슬금슬금 원피스를 벗었다.


겉에 입고 간 건 셔츠형 원피스라 단추를 끌러야 했는데 주섬주섬 상의만 살짝 풀었다가 어깨정도 내놨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훌렁 벗었다. 사실 사람이 없는 곳을 골랐으니 나를 쳐다보는 사람도 없었다. 누가 보지도 않는 곳에서 나 혼자 그런 고민을 했는데 나름대로 한계를 부수는 행동이었다. 막상 비키니 상태로 바다에서 햇볕을 쬐고 있으니 왠지 모를 해방감이 느껴졌다. 아마도 평소에 하지 않는 모습이었던 만큼 나름의 일탈로 받아들였던 거 같다. (사실 그러고서도 조금은 쑥스러워 선글라스는 쓰고 있었다. 선글라스가 있다면 방어력이 꽤나 높아진다는 걸 격하게 깨달았다.)


이 이야기를 꺼낸 건 지금이 바로 그 원피스를 벗어던져야 하는 상황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비키니를 보이기 위해 눈 딱 감고 원피스만 훌렁 벗으면 됐던 것과 달리 글에서 나를 솔직하게 드러내려면 뭔가를 더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 그 부분을 걱정하고 있다.


자의식을 깨야하는 상황을 다시, 또다시! 마주한 것이다. 이번 과제에서 나름 더러운 단어들을 써가며, 역겹다고 생각하는 장면들을 묘사하며 제출하고서 계속 그 글에 시달렸다. 어떤 피드백을 듣게 될까 이토록 걱정된 적이 없었다. 수업날까지도 너무 신경 쓰느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피드백 순서가 다가올수록 숨이 막혀서 차라리 빨리 끝나라 싶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나 약하다는 평가를 받을 줄이야!


사실 수업이 끝나고서는 이게 약하다고? 그럼 내가 정말 역겨운 게 뭔지 보여줄게! 하는 오기도 들었다. 알아챈 사람도 있지만 사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나는 깡다구가 부족하다. 남의 눈치를 많이 보고 생각보다 더 보수적이라는 것도 이번 과제로 알게 됐다. 그렇다고 내가 정말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람은 아닐 텐데 내가 알고 있는 나와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나 사이에 너무 격차가 커서 답답했다.


내가 알고 있는 나는 내핵이다. 언제나 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틈만 보이면 밖으로 나가려고 준비태세이다. 하지만 그걸 막는 게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는 나, 맨틀이다. 내핵이 그걸 뚫고 나가기에 맨틀이 워낙 단단히 자리 잡고 있다 보니 기회를 못 잡고 있다. 내핵의 온도를 느끼게 해줘야만 오 사실은 정말 뜨겁구나 하고 알 수 있는데 맨틀이 그걸 막고 있다. 항상 터질 거 같은 나를 보호하는 것처럼 가리고 있다 보니 진짜 온도를 느낄 새가 없는 것이다.


한계를 뚫고 간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지금 여실히 느끼고 있다. 속에서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걸 하지 못하고 끙끙 앓는 것처럼 답답하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두렵기 때문일까? 끝의 끝까지 갔을 때 내가 말하는 게 너무 아무것도 아닐까봐 걱정하는 걸까? 아니면 그 극단적인 생각을 들여다봤을 때 내가 생각보다 너무 별로인 사람이라 스스로를 싫어하게 될까봐 미리 겁내는 걸까? 


깨달은 걸 말하며 훈훈하게 마무리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아직은 답을 못 찾았다. 그래도 다행인 건 일단 지금 나를 믿고 그 한계점을 열심히 찾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처음엔 영원히 이 벽을 깨지 못할까봐 무서웠지만 일단 깨고 나면 훨씬 자유로워질 게 기대되기도 한다. 내가 나를 제대로 알게 된다면 글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사람을 대할 때 이전보다 훨씬 나답게 행동할 수 있을 거란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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