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애쓰지 않아도 되는,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참 어려운 일이다
일 년 만에 정 대리님을 만났다. 정 대리님은 전 전 직장에서 처음 알게 된 상사이다. 나는 말단 편집자로, 정 대리님은 디자이너로 같은 책을 함께 진행하기도 했다. 대리님과 나는 입사 시기가 비슷해서 우리는 ‘굴러든 돌’의 처지로 비슷한 종류의 괴로움을 함께 나눈 일이 많았다.
정 대리님한테 몇 달 만에 온 연락이 반갑고 신기했다. 그 이유는 정확히 딱 한 달 전에, 소담스럽게 핀 불두화를 보고 공연히 그녀 생각이 났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통한 것 같았다.
그런 기억들이 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인데도 특별한 의미가 담긴 스냅 사진처럼 선명하게 기억되는 것들. 이 년 전, 파주로 회사를 다닐 때 대리님과 점심을 먹고 회사 근처를 거닐다가 푸지게 피어있던 불두화를 보았다. 저게 무슨 꽃인지 혼잣말 비슷하게 하며 궁금해하던 대리님한테 “부처님 머리를 닮아 불두화”라며 알려 드렸고 웃음이 많은 대리님이 웃기 시작해서 나도 따라 웃었다. 왜 그렇게 웃음이 터졌는지 의아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하판이 얼마 남지 않아서 야근을 자주 했었고, 회사가 합정에서 파주로 이전한 지 꽤 되었는데도 적응하기가 어려웠던 때여서일 것이다. 웃을 만한 일이 거의 없어서랄까.
지금은 나도, 대리님도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회사와 무관한 사람들이 되었다. 나는 레일에서 튕겨 나와 더 재미있는 무엇이 있지 않을까 두리번대는 중이고, 대리님은 합정에 위치한 다른 회사로 이직을 했다.
대리님과의 약속 장소는 커다란 창문이 있어서 초여름밤 특유의 공기를 느낄 수 있는 합정의 어느 맥줏집으로 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지만 그간의 시간을 단숨에 뛰어 넘어 어제도 본 것처럼 서먹함이 없었다. 대리님은 내 얼굴에서 전에 없이 흥이 느껴진다고 했다. 나는 그 말에 탄력을 받아 요즘 새롭게 하고 있는 여러 사업에 대해 기분 좋게 털어놓았다. 막 절반 넘게 비워가는 맥주의 힘도 컸다.
돌이켜보면 대리님한테 기분 좋은 이야기를 했던 적이 많지 않았다. 이 년 전의 나는 그녀에게, “대리님, 저 어떡해요”로 시작하는 이야기들만 곧잘 했었다. 직장 상사에게 이런 이야기까지 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집안, 이직, 연애 고민을 고루 빠짐없이 말이다. 주로 점심시간 회사 근처의 카페에서, 이따금의 퇴근길엔 다찌가 있는 맥줏집에서 내가 먼저 우는 소리를 내면 대리님은 자기 일처럼 들어주고, 같이 열을 내주기도 하고, 이야기의 끝에서는 언니처럼 방안을 주었다. 그때의 고민들은 저절로 해결이 되었거나 이제는 희미하게 미소를 짓게 하는 정도로 기억되지만 이 년 전의 나에게는 막막할 만큼 큰일이었다. 물론 매번 대리님을 답답하게만 한 것은 아니었다. 비슷한 취향을 나누던 우리는 점심시간을 쪼개어 회사 인근의 땡스북스나 오브젝트를 방문하고서는 사무실로 복귀하는 길에 서로의 노획물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기도 했다.
아주 오랜만에 정대리님한테 “유진씨, 정말 잘 됐다”라는 말을 들으니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철모르던 나의 시절을 알고 있는 대리님한테, 가장 나답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회에서 만난 인연, 더욱이 서로 소속은 다르지만, 하여간 직장 상사로 알게 된 관계가 이만큼 귀하게 이어질 줄을 몰랐다. 정 대리님한테 한 번도 말한 적은 없지만, 그녀는 내 인생에 몇 없는 ‘언니’들 중 한 명이다. 애쓰지 않아도 되는,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참 어려운 일이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는 일에 관해 자주 생각하는 요즘인데, 거기에는 정 대리님 얼굴도 떠오른다.
2017.06.24.
온실과 난전
온실과 난전이, 어제와 오늘이 섞인 일기를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