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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Dec 02. 2020

사색의 거리가 있던 풍경

_낙원동 서울 아트시네마


무엇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기 좋은 장소를 떠올리면 역시 깊은 밤, 내 작은 침대 위가 가장 먼저 그려진다. 별다른 부침 없이, 익숙한 냄새가 나는 어떤 공간은 누구에게나 사색의 장소로 가장 알맞을 것이다. 매일 자고 깨는 침실의 침대만큼은 아니지만 거기에 잇따라, 지금은 없는 극장 하나가 떠오른다. 정확히 말하면 장소를 이전한 게 맞는 그곳은 지금의 서울극장으로 이전하기 전 종로 3가 낙원상가에 있던 서울아트시네마다(편의를 위해 낙원 아트시네마로 표기한다). 


낙원 아트시네마는 악기 상점들이 복닥복닥 모여 있는 낙원상가 건물의 4층에 2005년 4월부터 2015년 3월까지 자리를 지켰다. 처음 방문했던 것은 2008년 여름이었으니 내가 낙원동 아트시네마의 모든 역사와 함께한 것은 아니다. 첫 방문의 기억만큼은 강렬해서 어제 일처럼 잘 떠오른다. 극장에 가려면 한 번도 드나든 적 없는 비좁고 후미진 골목을 지나쳐야 했다. 골목에는 전국 각지의 지명을 간판으로 하는 노포들이 모여 있었다. 식당 밖에서 막 쪄낸 음식의 훈김과 돼지고기 특유의 냄새가 섞여서 조금 정신이 혼미했던 기억이 있다. 무사히 낡은 건물 앞까지 당도하여서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밖은 한없이 뜨겁고 시끄러운데, 서늘한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리스트의 피아노 연주가 흐르는 게 좀 재미있었다. 맨 꼭대기 층에서 내려서 왼쪽으로 몸을 트니까 휑하게 공터가 펼쳐져 있었고 인사동의 거리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아트시네마에서 처음 본 영화는 세르지오 레오네의 <황야의 무법자>였다. 재미있게 본 영화는 아니다. 서부극은 영 내 취향이 아니었고 전적으로 동행의 취향이었다. 그 여름의 ‘바캉스’를 이 아이와 보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마음으로 잔뜩 부풀었었기 때문에 사실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동행과 함께한 날 보다는 혼자서 나섰던 극장의 기억이 더 많은 것 같다. 꼭 보고 싶은 영화가 있을 때 말고도 예기치 않게 시간이 생기거나 집에만 있기에 좀이 쑤실 때, 홈페이지에 안내되어 있는 시간표를 대충 확인하고서 무작정 낙원 아트시네마를 갔다. 더 이상 낯설지 않은 골목을 지나 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낙원까지 가는 여정에 ‘영화 보고 나서 뭐 먹지’ 하는 시시콜콜한 생각이나 장막에 싸인 듯 뿌옇게 느껴지는 미래의 내 모습까지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별 생각들을 했다. 


옥상에 내리면 거기서 몇 번 마주쳐서 얼굴이 익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기 위해 먼저 와 있었다. 관상용 물고기처럼 느릿느릿 움직이는 사람들은, 단 한 번도 인사를 나눈 적은 없지만 나에게 이상한 위안을 주었다. 매표소에서 티켓을 끊고 뻥 뚫린 전경의 인사동을 잠시 내려다보는 일은 내가 낙원 아트시네마에게 건네는 반가운 인사 같은 것이었다. 


사색을 위한 장소로 ‘극장’이 합당해 보이지는 않는다. 영화관과 함께 온갖 상점이 밀집한 멀티플렉스에서는, 연신 ‘띵동’ 울리는 대기 번호 알림과 진동하는 팝콘 냄새만으로 기분이 들뜨기 때문이다. 그러나 낙원 아트시네마는 그 옥상에 오르면 바깥의 세계와는 다르게 시간이 흐르는 듯했다. 팝콘을 팔지만 누구도 사 먹지 않는 카페테리아에서 가끔 커피를 마셨고 영화를 기다리는 동안 로비 의자에 앉아 가져온 책을 읽었다. 책이 잘 읽히는 장소를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많지 않은데, 이상하게도 낙원 아트시네마의 로비의 불편한 간이 의자가 비교적 상위권에 들었다. 종로에서 저녁 약속이 있는데, 그 전에 애매하게 시간이 뜰 때에도 일없이 로비에 가 있는 경우도 있었다.


낙원 아트시네마에서 몇 편의 영화를 봤을까. 티켓을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으니 언젠가 헤아려 보면 될 것이다(아트시네마는 지금도 티켓을 발권해 준다.). ‘내가 이런 것도 봤었나?’라는 생각이 들 만한 영화도 있겠고, 무르나우의 <선라이즈>나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 같은 아름다운 흑백영화의 티켓은 두 장 이상을 보관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참 우스운 사실은 영화를 다 보고는 누구보다 잰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계단을 후다닥 내려왔던 것이다. 하릴없이 또 올 것이지만 안 올 사람처럼 냉담하게 작별을 했다. 낙원상가를 빠져 나와서 낮과는 다르게 고요한 인사동 거리를 가로질렀다. 안국역까지 걸어서, 거기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루트를 즐겼다. 방금 본 영화에서 기억할 만한 몇 장면까지를 더해, 걷는 동안 생각할 거리가 더 늘었다. 


여전히 서울 극장으로 이전한 아트시네마를 찾는다. 2022년에 충무로에 번듯하게 마련되는 시네마테크의 완공까지 보금자리가 될 공간이다. 자그마하지만 나름대로 휴게실도 갖춰져 있고 조용한 영화를 볼 때 가끔 성가셨던 비보이 공연장의 음악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가끔 유일한 전망을 지녔던 낙원의 옥상이, 듬성듬성 테이블이 놓여 있던 낙원의 로비가, 낙원에서 영화를 보고 귀가하던 인사동의 어두운 거리가 생각난다.



17.10.08.



온실과 난전

온실과 난전이, 어제와 오늘이 섞인 일기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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