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진 Mar 16. 2021

천천히 봄이 온다

_르 자뎅 드 무슈 리


지난여름 이래 뿌리지 않던 향수를 올 들어 처음 개시했다. 


겨우내 뿌렸던 머스크향이 요즘따라 무겁게 느껴지는 이유를 생각해 보니, 낮에는 제법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던 나날을 요 며칠 보냈기 때문이었다. 비록 바람은 아직 차서 트렌치코트보다는 코트에 손이 더 가지만.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의 변화일지라도, 산뜻한 기분을 내고 싶었다.


‘무슈 리의 정원(Le Jardin de Monsieur Li)‘이라는 이름을 가진 향수를 간만에 뿌려 본다. 투명한 병 안에는 노란색과 라임색이 감도는 액체가 넉넉하게 찰랑인다. 작년 베트남 여행 때 사놓고는 얼마 쓰지 않고 둔 까닭이다. 


뿌리면, 맨 먼저 감귤류의 냄새가 치고 올라온다. 그러나 달콤하지는 않은 묘한 향이다. 덜 여문 과육이 떠오른다. 영글어 가려고 한창 햇빛에 그을려 지는 그런 감귤이다. 아직 푸른 기가 도는 과일의 향이 스치고 나면, 작은 연못과 그 주위에 심어 놓은 몇 그루의 대나무가 그려진다. 찻잎의 쌉싸름한 향도 풍기는 듯하다. 무슈 리의 정원은 아담하고 고요한 풍경을 지녔을 것이다. 


나는 처음 이 향을 뿌렸던 그 공간, 그 시간으로 내달린다. 반년이 넘는 시간의 간격이 순식간에 메워진다. 


지독하게 무더웠던 지난 해 여름, 짧은 일정을 내어 베트남의 호이안을 방문했다. 기대했던 경치는 생각보다 조악했고, 고수를 뺀 쌀국수에서도 미량의 고수 향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곤혹스러웠다(그때는 고수 향을 견딜 수가 없었다). 경적을 울리며 좁은 거리를 활보하는 오토바이 소리와 물 만난 고기마냥 시끄러운 관광객들 틈에서 나는 여행의 목적을 몰랐다. 이곳을 다시 올 일은 없을 거라 예감하며 구시가지의 좁은 골목을 누비고 또 누볐다. 그러다가 옛날식 목조 주택을 개조한 작은 찻집을 만났다. 대낮인데도 실내는 어두웠고, 소란스러운 밖과 다르게 유난히 조용했다. 실외와 다른 차분한 공기가 감돌았다. 


탁자에 앉자 서버가 체크리스트 형식의 메뉴판을 가져다주었다. 그녀는 손짓으로 메뉴판의 일부를 가리키며 무언의 설명을 했고, 카페의 종업원들끼리는 서로 수화로 소통을 하고 있었다. 그제야 이토록 고요한 분위기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았다. 그들은 모두 청각장애인이었고, 손님들도 거기의 분위기에 젖어 속삭이듯 대화를 하거나 아니면 필담을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탁자 위에는 ‘bill’, ‘ice’, ‘cool water’ 같은 말이 적힌 작은 나무 블록이 놓여 있었다. 나는 재스민 차에 체크 표시를 한 메뉴판을 서버에게 넘겨주었고, ‘thank you’가 적힌 나무 블록을 재빨리 그녀에게 보였다. 


차를 기다리는 동안 집채의 뒷마당을 구경했다. 꽃나무가 우거진 뒷마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서너 개의 나무 탁자만이 몇 개 놓여 있었다. 그 위로 무성한 나뭇잎을 투과한 햇빛이 부서져 내렸다. 자잘한 그 빛은 햇빛을 되쏘는 사금파리처럼도 보였다. 어두운 실내와 대조적이어서 자꾸 들여다보고 싶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미 한낮의 열기에 지쳐서인지 좀처럼 나가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금단의 정원을 엿보는 사람처럼 빼꼼 내다볼 뿐이었다. ‘고요함 속의 고요함’이라는 말이 적절한 때와 장소라고 생각할 때쯤, 여행지에서 최초로 개봉한 향수의 냄새가 훅 끼쳤다. 싱그럽고 쌉쌀한 냄새였다. 그런 향이 내 몸에서 풍기는 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지만, 세상에서 나만 아는 비밀을 지니게 된 것 같았다.


‘무슈 리의 정원’은 조향사가 중국식 정원을 떠올리며 만든 향수라고 한다. 나는 무슈 리의 정원이 대낮의 호이안, 작고 조용한 찻집의 그보다 더 고요한 뒤안을 닮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더디지만 분명히 봄은 오고, 반년 만에 다시 작은 정원을 품어 본다.



2017.03.15.

매거진의 이전글 뒤돌지 않는 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