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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Jul 25. 2019

생각의 타래를 풀어주는 흑맥주 한 잔

_명륜동, 도어스 2(Doors 2)



‘글’을 성분 분석할 수 있는 원심 분리기가 있다면, 내가 여태 써 온 이런저런 글의 성분 중 7할 정도는 기네스(Guinness) 맥주로 이루어졌을지도 모르겠다.

혼자서건 둘, 여럿이건 대체로 술자리를 좋아한다. 다만 동행이 있는 술자리는 각자의 생활이 바쁜 이유로 특정한 날 미리 약속을 잡아야 하기에 흔하게 성사되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홀로 갖는 술자리는 마음만 내키면 언제든 할 수 있고, 방전된 핸드폰을 충전시키는 듯한 혼자의 시간도 좋아하기 때문에 나는 자작하는 일이 편하다. 몇 번을 반복해 본 영화를 보는 둥 마는 둥 틀어 놓고서든 평일의 한산한 밤에 즐겨 찾는 바에 가서든 말이다.     


만만하게 혼자 마셨던 술은 역시 맥주다. 특히 쌉쌀한 맛의 스타우트 맥주를 좋아하는데, 이러한 ‘흑맥주’의 대표 격으로 비교적 구하기 손쉬운 기네스를 제일 많이 마셨다. 혼자 맥주를 따르는 몇 날의 밤을 겪고 나서 언뜻 짙은 밤색 혹은 검정으로 보이는 이 맥주의 빛깔을 자세히 관찰하면, 진한 적색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안주 삼아 집에서 마셨을 때는 몰랐지만, 어두운 불빛 아래 바 테이블에서 매번 들이켜던 음료의 오묘한 색을 발견했다.      



별 일이 있지는 않았어도, 그날도 아마 나로 하여금 맥주를 따를 수밖에 없는 자잘한 까닭이 있었을 것이다. 왠지 자꾸 신경이 쓰이는, 친구의 문자 말투부터, ‘이다지도 나는 사방이 꽉 막혔을까.’라는 울적함의 급습, 이다음에 써 볼 글은 고인 물이 아니라 물결이 일렁이는 생생한 글이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바람 같은 것들이 마치 타래처럼 얽혀서.      


느릿하게 잔에 기네스를 따라서 탄탄한 거품 층을 만들어 놓고는, 그것을 잠시 둔다. 곧장 마시지 않는다. ‘히야시’가 잘 된 생맥주라면 머리가 띵할 정도로 단숨에 들이켜지만 기네스는 다르다. 이 때는 밤 하늘색 액체를 바라보며 생각의 뭉치를 톡톡 건드려 보는 시간이다. 그러고서 따뜻한 커피를 홀짝이는 기분으로 마신다. 쌉쌀하면서 구수한 맛이 입안에 퍼지고, 한 모금 두 모금 넘길 때마다 타래가 슬슬 풀린 적이 꽤 있다.  

 

마음속 못생긴 덩이가 풀어지기 시작하는 기분이 들면, 알코올이 맡은 역할을 적절하게 하고 있다는 증거다. 나는 주로 이쯤에서 술자리를 마무리 지으려고 한다. 물론 ‘문제’들이 말끔하게 해결되지는 않는다. 축구공 크기였던 타래가 야구공만 해지고, 나는 그것을 한 손으로 충분히 놀릴 만하다고 느끼는 때를 위해 혼자 술을 마신다. 적당히 호기로운 마음이 들 때, 그러니까 ‘에라, 생각의 타래 따위 모르겠다!’고 무책임해지기 직전까지다.      


기네스 뒤에 따라붙는 석자의 이름은 ‘도어스(Doors)’다. 짐 모리슨이 있었던 록 밴드 ‘도어스’의 이름을 딴 맥주집이 전국에 몇 개나 있을지 모르겠으나 나의 도어스는 명륜동 성균관대 정문 근처의 2층 건물에 있는 작은 바 <도어스 2>를 말한다. 턴테이블로 음악을 트는 엘피 바다. 사실 근처에 도어스가 하나 더 있다. 그곳이 원래 엄마 격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경호 씨(사장님의 이름이다. 단골이라면 응당 이렇게 부르곤 한다)가 20년가량을 운영한 엄마 도어스는 후배 사장님께 물려주고, 맞은편 골목에 아들 격인 <도어스 2>를 차려 200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같은 자리에서 묵묵히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 작은 바의 역사를 다는 모른다. 그러나 눈에 익다 싶으면 새로운 가게가 들어서는 요즘 대학가 상권의 속도를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다.       



육중한 나무 문을 열기 전부터 노랫소리가 들리는데, 내가 일상에서 몇 안 되게 사랑하는 순간이다. 작은 굴속을 연상케 하는 어두운 홀에는 중앙의 테이블 몇 개와 바 테이블이 두 개 있다. 말수가 적은 경호 씨가 앉아 있는 편의 바 테이블에는 거의 앉지 않고, 홀을 등진 바 테이블에 앉는다. 한적한 평일 밤에 거기 앉아서 기네스 한 병을 따라 마시면 꼭 새벽녘의 성당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기도를 하지 않고 그저 앉아 있는 것만으로 차분해지던 마음을 그 자리에서도 느낀다. 이때쯤이다 싶을 때, ‘짜르(Czar)’ 버전의 <Where the boys are>를 경호 씨가 틀어주는데, 그러면 잔잔했던 마음에 파문이 일고, 나는 속으로 실소를 터뜨리고는 기분 좋게 잔을 들이켠다.




도어스 2(The Doors 2)     

02-762-0189

서울시 종로구 창경궁로 29길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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