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마시고 여행하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는 'Her Report',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지며 잠시 소식을 쉬었습니다. 외식을 하고 여행을 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고 분위기가 이러니 그런 이야기를 올리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고. 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래 준비하고 계획했던 일들이 취소되거나 연기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요즘 같아서는 잡지에 소개할 기사가 있긴 할까 걱정되는 상황입니다. 촬영과 취재가 이어지는 업무 특징상, 다른 사람들과의 완벽한 격리가 쉽지 않다 보니 조심스럽게 일을 하다 지난 주부터 이번 주까지는 저희 회사도 재택근무, 리모트 워크, 스마트 워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집에서는 공부건 일이건 못하는 저는 사람 없는 사무실에 나와 이 공간을 전세 낸 기분으로 밀린 일을 진행하고 있지요.
코로나 사태가 심각해지는 동안 내가 집에서 무얼 제일 많이 했나 봤더니 세 가지였습니다. 책 뒤적이기(읽었다고 말하기에는... ), 넷플릭스로 영화보기, 음악듣기. 혼자서 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일들일 것 같습니다. 그중 심혈을 기울인 도전은 '모아놓은 CD 순서대로 다 듣기 프로젝트'였습니다. 대학생 때부터 열심히 CD를 사모았는데, 심할 때에는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CD를 잔뜩 사들여도 또 살 게 많아 점심 굶고 그 돈으로 CD를 사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모아들인 CD는 보관하기가 어려워서 아이팟이 나오며 한 번 정리를 했고 결혼해 집을 옮기며 대폭 또 한번 정리를 해서 지금은 1500장으로 줄어들었습니다. 타이달과 애플뮤직, 멜론 등의 스트리밍 서비스도 이용하지만 역시 눈으로 죽 훑어보고 맘에 드는 것 골라 트는 즐거움이 있고, 음악을 '갖고 있다'는 느낌을 주니 CD 사기를 멈출 수가 없습니다.
CD는 잔뜩 가져다 놓고 맨날 같은 것만 듣는다는 H의 놀림을 듣고 보니, 정말 그랬습니다. 사놓고 한두 번 밖에 안들은 앨범도 꽤 많아서 올해 신년 목표로 갖고 있는 CD를 다 듣겠다고 결심한 후 재즈, 록, 팝과 R&B, 클래식, 가요 등의 장르별로, 알파벳과 가나다 순으로 정리해 놓은 대로 한 장씩 듣기 시작했습니다. (MBTI 전문가인 후배가 너무나 NT스러운 발상이라고 놀렸는데, 회사에서 검사했을 때 제가 ENTP였긴 했습니다^^). 이런저런 일로 바빠 계획이 늘어져 한참 동안 재즈 장르, 듀크 엘링턴에 머물고 있었긴 합니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가 일어났고 그 덕에 저녁에 퇴근 한 후, 아니면 주말을 이용해 음악 듣는 일이 늘어났습니다. 매일 두 세 장의 CD를 듣고 여기에 더해 플레이리스트를 한도 끝도 없이 만들어 대고 있습니다. 저는 리스트마니아라서 무슨 일이건 리스트를 만들어 보는데, 음악도 예외가 아닙니다. 좋은 새 노래나 음악가를 발견하거나 추천을 받거나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매력을 알게 된다거나 하면 계절별, 상황별, 주제별, 아티스트별 등등 플레이리스트를 만들고 수정하고 지우는 일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퇴근 후 컴퓨터를 켜놓고 노래를 찾다가 CD를 확인했다가 따라 부르기도 했다가.... 생각보다 훨씬 즐거운 일입니다. 좋아하는 것에 시간을 이렇게 쓸 수 있다니요. 50일 가까이 '자발적인 고립'을 선택하지 않았으면 해보지 않았을 일입니다.
익숙한 옛날 노래만 줄창 듣는 일은 피하기 위해, 몰랐던 새로운 젊은 아티스트들이 궁금해서 요즘은 사람 없는 사무실에서 HOT 100을 스트리밍해 놓고 일합니다. 조용한 음악은 위로가 되어서, 신나는 음악은 응원이 되어서 나름대로 다 좋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방식으로 '고립'을 이겨내고 계실지.... 궁금하네요. 모두들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요!
* 저의 플레이리스트 중 몇 가지는 애플 뮤직에 공개해 놓고 있습니다. HERreport나, @kimeunryoung 으로 검색하시면 찾을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