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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R Report Aug 13. 2020

Her Book; 이브 엔슬러, <아버지의 사과 편지>

무덤에서 불러낸 아버지에게 사과를 요구한다면,

회사일로 너무 정신이 없어서 주말만 되면 밀렸던 잠을 자느라 정신 없었는데 5년 만에 번역서 <아버지의 사과 편지>를 내게 되었습니다. 지난 해 봄 시애틀의 아마존 서점에서 작가이자 페미니즘 운동가인 이브 엔슬러의 <Apology>를 H가 발견해 이 책을 한국에서도 소개해야겠다며 출판사와 상의했고, 제가 번역을 맡게 된 것이지요.

<버자이너 모놀로그> 등의 작품을 통해 널리 알려진 이브 엔슬러는  자신의 다른 작품을 통해 다섯 살 때부터 친아버지에게 심각한 성적 학대와 폭력을 당했다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브 엔슬러가 66세인 2019년 새로운 책을 발표합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고 난 지 30년, 자신의 인생 내내 고통을 가했던 과거와의 지겨운 고리를 끊어버리고 완전히 자유로워지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Apology>라는 제목으로 죽을 때까지 죄를 인정하지도, 사과하지도 않은 아버지를 대신해 상상 속에서 사과의 이야기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스 비극처럼 드라마틱하고 장중하게, 슬프고 절절하게 아버지의 눈을 통해 학대 받은 어린 소녀가 어떻게 성정하고 어떻게 상처에 정면으로 대응해 가는지 보여주는 책입니다.    

번역을 맡기로 결정하고 지난 가을과 겨울 내내, 주말마다 카페에 음료를 몇 잔 씩 시켜놓고 앉아서(그때는 코로나 사태가 심해지기 전이었지요 ㅠ) 책을 노려보며 심란해했습니다. 그리 두껍지 않은 작고 얇은 책인데 페이지 한 장 넘기기가 힘들었습니다. 딸이 다섯 살부터 열 살 때까지 성적 학대를 일삼다가 그후로는 엄청난 구타와 함께 정서적 폭력을 행사한 아버지. 자신의 행위가 어려서 부모로부터 사랑받지 못했고 인간답게 키워지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는 변명에 원고를 번역하다 나도 모르게 "이 뻔뻔한 거짓말장이" 하고 외치기도 했고 더 심한 욕도 중얼거렸습니다. 추악한 범죄를 저지른 아버지를 대신해 이렇게 사과를 상상까지 해야 하나 저자에 대해 화가 났지요.

이 책은 가해자가 스스로의 악행에 어떤 변명을 하는지 보여주고 이런 폭력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몸과 영혼에 어떤 상처를 만드는지 보여줍니다. 동시에 어떻게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갈지 보여주기도 합니다. 잘못을 저지르고 사과조차 하지 않는다면, 무덤에 들어갔다고 해도 송환해서 죄를 물을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이브 엔슬러의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기도 합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친아버지'라는 단어 대신 상사, 교사, 선배, 남편 등 물리적, 상징적 권력을 갖고 있는 그 어떤 대상을 바꿔 넣어도 같은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친족 성폭력과 각종 위계에 의한 성폭력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지만 밖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세상은 피해자에게 침묵과 은폐를 강요하고 알아서 스스로를 치유하라고 강권합니다. 이 책에서 아버지인 아더 앤슬러는 딸에게 '네가 당한게 정말 추행이었냐' '어떻게 너를 키운 아버지에게 이럴 수 있냐' '너가 조용히 감내했으면 문제되지 않았을 일이다' 하고 이야기합니다. 성폭력과 성추행 사건이 등장하면 "잊고 털어버리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세상에서 너무나 자주 등장하는 반응이지요.       

“네가 얼마나 대단한 소녀인지 생각해보아라. 네가 오늘 얼마나 먼 길을 왔는지 생각해보아라. 지금 몇 시인지 생각해보아라. 아무 것이라도 좋으니 생각해보아라. 그리고 울지 마라.”
<아버지의 사과 편지> 역자 후기에서 제가 좋아하는 <거울나라의 앨리스> 중 한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백색여왕이 앨리스에게 해준 말처럼, 우리는 주위를 둘러보고 피해자들이 혼자 울다 지치는 일이 없도록 서로를 보살필 것입니다.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모두를 위해 제일 앞에서 힘들게 싸우고 있는 것은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으니까요.

#아버지의사과편지 #이브엔슬러 #심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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