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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R Report Feb 19. 2020

세탁기의 배신, 강양구 기자의 <과학의 품격>을 읽고

작년에 결혼한 부부와 저녁식사를 했다. 사실 정확히 나이를 알지는 못하는데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사이일 것이다. 내가 업무를 함께 하는 직원 A가 자신의 남편 B와 함께 나에게 저녁을 사주고 싶다고 해서 고마운 마음으로 나갔다. 처음 본 남편 B가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내겐 그의 이야기가 상당히 흥미로웠다. 생명과학을 전공한 그는 "원래"라는 말을 가장 싫어한다고 했다. 습관적으로 누군가 "원래 그런 거"라고 하면 자신은 의심을 하기 시작하고, 그 근거를 찾아본다고 한다. "원래 그런 것"의 근거가 불분명한 경우가 많다고. 그의 이 말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최근 이상문학상의 "원래 그랬던" 저작권 문제에 대해 소설가 윤이형이 항의의 뜻으로 절필 선언을 했고, 이는 동료 소설가들의 호응을 이끌어 냈고, 뒤늦었지만, 그리고 만족스럽지 않지만, 문학사상출판사는 사과를 하고 저작권 조항에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이 사태를 보면서 내가 든 생각은 세상이 왼쪽이나 오른쪽이 아닌 앞으로 나아간다는 의미에서 진보를 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원래 그랬던"것에 대해 의문을 품고, 대다수의 의견과 다를지라도 자신의 문제 의식을 공유하는 것이 필요하다. 만약 윤이형 소설가가 동료에게 의문을 제기했을 때 "원래 그런거야"라는 말을 듣고, 그가 "그런가보다"하고 침묵했다면, 이번과 같은 변화와 진보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서 오늘 만난 남편 B의 이야기 한 대목 더. 그는 어떤 마음이 불편한 상황을 만나게 되면, 자신의 느낌을 억누르기보다는 "왜 그렇게 느끼지?"라는 질문을 갖고 그 이유를 찾아보기 시작한다고. 물론, 그런 문제를 제기하기도 해서, 때로는 직장에서 따돌림을 받을 때도 있다고 했지만, 내게는 B가 상당히 용기 있는 사람이면서 심리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한창 난리다. 이번에 한 가지 과거와 달리 '진보'된 부분이 있다. 신속하게 환자가 방문한 병원과 시설 이름을 공개한 것이다. 여기에는 한 가지 잘 안 알려진 사실이 있다. 메르스 감염 당시 정부 방침을 어기고 (게다가 병원의 소송 압박을 이겨내고) 감염 병원 실명을 최초로 공개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강양구 과학기자이다. 그가 최근 <과학의 품격>이란 책을 냈다. 과학책방 갈다에서 그가 북토크를 한다길래 추운 겨울에 삼청동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가 쓴 책을 최근 읽었다. 첫 장은 황우석 사태의 진실에 대한 부분이다 (강 기자는 황우석 박사가 국민의 90% 이상의 지지를 받으며 영웅 대접을 받을 때, 그의 논문의 연구윤리에 대한 의심을 품고 진실을 파헤친 극소수의 핵심 언론인 중 한 사람이었다) 나는 밤늦게 잠들기 전에 서문이나 읽다가 자려고 했지만, 황우석 사태에 대한 글은 너무나 흥미진진해서 도저히 1장을 끝날 때까지 책을 손에서 내려놓지를 못했다. 이 부분은 꼭 한 번 읽어보시라 권하고 싶다.


이 책에는 <82년생 김지영>을 다룬 두 가지 이야기가 나온다. 한 대목은 세탁기와 관련된 것이다. "예전에는 방망이 두드려서 빨고, 불 때서 삶고, 쭈그려서 쓸고 닦고 다 했어. 이제 빨래는 세탁기가 다하고 청소는 청소기가 다 하지 않나. 요즘 여자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소설 속의 주인공 김지영이 아기를 낳고 하루 2시간도 못 자면서 집안일하다가 엉망진창이 된 손목을 보이자, 나이 든 남자 의사가 병원에서 피식 웃으며 던진 말이다. 분명 세탁은 세탁기가, 밥은 밥솥이, 청소는 청소기가 하는데 왜 여성의 가사 노동은 줄어들지 않을까? 강양구 기자는 미국의 역사학자 루스 코완의 연구를 소개한다. 세탁기가 없던 시절 미국에서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가족이 나누어 세탁을 했었다고. 오히려 부피가 큰 빨래는 남자들 몫이었단다. 그런데, 세탁기가 발명되자, 묘하게 세탁은 여성의 몫이 된다. 한술 더 떠서 가전 회사는 "얼룩 있는 옷을 입고 다니는 아이들은 엄마로부터 사랑을 못 받는 아이"라는 내러티브를 이용한 마케팅을 하고, 이는 결국 세탁기 판매를 늘렸지만, 동시에 여성의 가사노동 시간도 늘렸다. 결국 세탁기가 세탁이라는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킨 것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었다.


북토크에서 강양구 기자는 "Undone Science"라는 개념을 소개하면서 청중들에게 이를 잘 생각해볼 것을 요청했다. Undone science는 수행되지 않은 과학연구라는 뜻으로 "왜 어떤 과학 기술은 세상에 없을까?"라는 문제의식을 말한다. 역시 <82년생 김지영>의 대목을 인용한다. "이해할 수가 없어. 세상의 절반이 매달 겪는 일이야. 진통제라는 이름에 두루뭉술하게 묶여 울렁증을 유발하는 약 말고, 효과 좋고 부작용 없는 생리통 전용 치료제를 개발한다면 그 제약회사는 떼돈을 벌 텐데" 생리통 전용 치료제가 아직 나오지 않은 것에는 남성 중심의 과학계나 의학계에서 여성의 생리와 생리통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 적었던 탓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저자는 꼬집는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은 강변북로, 다이어트, 트럼프, 비트코인, 민물장어 등 총 72개 꼭지 중 두 가지 이야기에 불과하다. 요즘도 강양구 기자는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해서 가짜 뉴스가 아닌 팩트를 소셜 미디어를 통해 열심히 나른다. 그러면서 그는 "궁금한 건 괜히 소셜 미디어의 유언비어에 혹하지 말고 물어보자. 그러라고 나 같은 기자가 있다. 댓글로 달면 내용을 업데이트할 때 답하겠다"는 열정을 보인다. <과학의 품격>은 "과학기술을 개발하고(과학자), 정책적 지원을 결정하고(공무원), 보도하고(기자), 사용하는(소비자)의 품격"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책이다. 과학기술을 단지 과학자의 입장이 아닌 시민의 입장에서 친절하게 풀어준, 그리고 시민의 입장에서 의심하고, 위험을 감수하고, 보도해온 강양구 기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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