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을 모시고 자녀들을 데리고 모임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가운데 세대로서, 솔직히 말하자면 가정의 날들이란 것이 위아래에 대한 책임감으로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보답'에 대한 날선 부담에 이어 이제는 큰아이들의 귀찮음과도 상대해야 하니 차라리 떼쓰는 어린 자녀가 제일 낫다고 여겨질 때도 있다. 올해 역시 그렇게 맞이한 5월. 나는 이미 4월 어느날부터 성당에서 성체를 모실 때마다 "무사한 5월"을 반복적으로 되뇌이고 있었다.
5월 5일, 가정의 달을 기념한 가족모임을 마치고 식당 근처 수목원엘 갔다. 정말 오랜만에 다시 방문해본 곳이다.
비 예보가 2시간 단위로 미뤄지는 촉촉한 날씨 속에서 수목원은 말그대로 성수기였다. 어린이날을 맞이해 아이의 손을 잡은 어른들은 매표소 근처도 갈 필요가 없는 프리패스권이 주어졌다. 그렇다면 네 자녀를 둔 나는 환급을 받아야 하지 않는가요, 농담을 던지며 잠시 웃음을 피워내고 기꺼이 친정부모님에게 두 자녀의 손을 내어드리게 했다.
수목원 안에는 가꾸지 않아도 오래도록 아름다울 꽃들이 즐비하고, 길가에 출몰하는 곤충들도 생기가 넘쳤다. 평소에는 작은 곤충도 질색팔색하던 나인데, 이것들을 벌레라 여기지 않았다는 것은 그때의 심정이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았다는 것일테다. 시작은 불안했을지언정 막상 도래하고보니 딱히 나쁠 것도 없는 평화로운 시간이 이어졌다는 걸 느꼈다. 우리는 삼삼오오 흩어져 있었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즐거웠고, 단톡방에 속속 올라오는 인증샷들은 어쩌면 내 앞에 있는 나무의 뒤에서 5초전 찍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쩐지 나무에서 깔깔 소리가 나더라니.
늘 이래왔던 것 같긴 하다. 기념일을 앞둔 걱정은 누구로부터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기인한건지, 가정의 달로 향하던 불만의 화살은 부메랑처럼 나에게 돌아왔다. 여적지 예민하게 사니, 혹은 무던한 사람이 무언가로 인해 까다롭게 구는 사람이 되었니. 원래부터 그랬던건지 혹은 그런 사람이 되어버린건지 모르겠으나, 그래봐야 시작과 끝이 있는 한동안의 세월이라 여겨본다. 캘리그라퍼로서, 그 많은 삶의 영감과 아름다운 문장을 끼고 살아감에 깊이 안도해 보기도 한다. 보여주고 싶은 문장들은 곧 내가 듣고 싶은 위로였으므로, 역시 내게도 동아줄 같았기 때문이다.
어느새 수목원의 안쪽까지 다다랐다.
우리는 한 무리지만 각자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아이들은 엄마보다 10미터나 앞선 아빠와의 사이를 바지런히 오가느라 내 만보기 숫자에 3 정도를 곱해야 얼추 활동량이 측정될 터였다. 걱정할 일은 없었다. 선발대원인 남편이 계속해서 기준이 되어주고 있으니 나는 조용히 따라가며 푸르름을 만져도 괜찮은 시간이었다.
숲의 오솔길은 마치 명확한 길임을 설득하듯 고운 흙 위인데도 잡초 하나 없었다. 양 옆의 풀밭, 개미만한 꽃잎 앞에도 정성스럽게 만든 푯말이 꽂혀있는걸 보고 이곳 관리자의 배려와 노고에 절로 탄성이 나왔다. 지을 이름이 그렇게도 없었나 싶은 나무들이며, 난생처음 보는 야생화가 발목을 잡았다. 때때로 정교하게 지어진 거미줄에 감탄하느라, 또 여기쯤에서는 하늘이 얼만큼 보일지 궁금해서, 내 목과 고개는 필라테스 직전 몸풀기처럼 상하좌우로 열일을 했다. 이런 곳에서 필라테스를 하면 조금 덜 힘들수도 있겠는데? 하지만 다시 하라 하면 내가 과연 할까?하는 의문이 이어서 든다. 아니지, 그건 장소의 문제가 아니었어. 너무 비쌌고, 유료고문센터 같았지. 역시 자연 속에서 어울리는 직업은 화가일까. 모두가 초록색인데, 대체 화가들은 종이 위에서 숲을 어떻게 다루는 걸까. 그들은 잠자리의 눈을 가졌을지 몰라. 몇만개나 되는 낱눈이 눈동자 안에서 살고 있는거지. 가시광선을 넘어 자외선과 적외선까지도 섭렵했을까? 나는 갑자기, 최근에 생긴 노안을 떠올렸다. 글씨를 쓰려는데 앞이 흐려지면 어쩌라는거야. 이런 시련이 있다니. 아! 혹시 노안의 치료를 위해 나의 신이 이 초록의 숲에 데려온걸까? 문득 더 열심히 진한 녹색의 이파리를 관찰했다. 유레카! 네잎클로버잖아! 이런. 두 줄기가 모여있던 착시였다. 이내 풀이 죽었지만 고개를 들자마자 눈앞에서 청설모가 호로록 내 실망을 들고 튄다. 저걸 쫓아갈 힘은 없다. 아이들에게 말해주는 것도 포기했다. 반가웠던 내리막길을 다시 올라서야 할 것만 같아서. 그리고 아이들은 이미 저만치서 타조를 찾아 떠난다며 내게 소리치고 있었다. 아, 그래. 여기 타조가 있었지. 화석처럼 서있다가, 관람객이 뒤돌면 냅다 뛰어와서 겁을 주던 그 타조. 어떻게 나이들어 있을까, 근엄해졌을까, 괴팍해졌을까, 사알짝 기대하며 너른 길로 빠져나왔으나, 선발대원으로부터 타조는 이제 없다는 비보를 들었다.
우리는 온실로 향했다. 굽이굽이 다리처럼 지어놓은 데크를 아이들은 레이스하듯 질주했다. 좋아하지만 키우지는 못하겠어서 구경만 하는 몇가지 요소 중 하나인 몬스테라를, 그것도 아주아주 큰 우산급 몬스테라를 올려다봤다. 전에 그림공방에서 몬스테라 그리기를 배우다 포기한 적이 있었다. 내 그림보다 수채느낌의 스티커가 훨씬 더 멋있었기 때문이다. 스티커는 내게, 쉽게 가도 되는 길이 있다는 걸 가르쳐 줬었다.
조금 더 걷자 온실의 센터에 아담히 고여있는 물이 보였다. 이 연못 어딘가에는 개구리가 살 것 같다. 한 10년 전 아이들과 허브농원에 놀러갔을 때 작은 청개구리가 큰 딸의 머리카락으로 착지를 했었는데, 그 아비규환(?)을 겪고 개구리공포증이 생긴 큰 딸이 이 자리에 머물진 않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내 기억의 편린과는 다르게 아이는 종려나무의 수북한 털을 신기해할 뿐 정신적 요동은 없어보였다. 그 옆엔 바나나가 탐스럽게 열려있었는데, 조카가 호시탐탐 바나나를 노리길래 데리고 나와버렸다. 내가 한바퀴 돌 때 세바퀴를 돌던 아이들이니, 이 정도면 충분했겠지.
아직 낮이 한창인데 하늘이 어둑해졌다. 미뤄졌던 비예보는 그때가 마지막 연착이었나보다.
산달이 다음 달인 동생과 많이 걷지 못한 것은 아쉬웠다. 그녀의 세살된 딸이라도 데리고 다니고 싶었으나, 친정엄마의 등에서 잠드는 바람에 그 삼대는 수목원의 정자를 지켰다. 한여름이었다면 수박을 올려놔야 할 것 같은 마루였다. 예전 같았으면 생각도 싫은 그림이다. 아마 막내의 모기알러지를 이유로 식사 직후 해산하자 했을지도 모른다. 실마리가 없는 장서갈등에서 어느 쪽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 흘렸던 눈물과, 후벼파여 다 죽어가는 가슴을 아이들이 날마다 살려내 뱉던 가느다란 숨들이, 모두 막내의 모기알러지로 퉁쳐버려질 일이었다.
수목원을 걷는 나에게 묻는다. 예전부터 꽃을 좋아했니, 프로필사진이 꽃밭이 되는 반열에 들어선거니. 젊었을 때 꽃을 받은 적이 있었을 테지만 그 꽃은 질투어린 시선을 바라는 일 외엔 정작 스스로에게 아무런 위안도 행복도 주진 못했던 것 같다. 아무렴 어때. 지금의 내가 꽃이 좋고 나무가 좋다는데, 겸손하게 살아있는 생동감이 좋다는데, 이 수많은 색마다 기억을 품고 있는데, 이쯤되면 나의 2막을 올려봐도 되지 않나. 어쩌면 3막인가. 분명 커튼이 내려져 있을텐데, 이제는 '인생은 어렵다'의 모순을 풀어나가는 무대를 열어야 할 때이지 않을까. 주무르고 내리치고 흔들어 찢어놔도, 가만히 두면 바닥에 몸을 펼쳐누이는 슬라임 같은 인생. 시험도 숙제도 아닌 이것이 쉽고 어려울 게 어디 있을까. 무려 최고의 난제였던 가족모임에서 나의 어려움은 연통으로 들어갔으니 굴뚝을 통과해 무사히 탈출했겠지. 때론 비를 만나 다시 나에게 흘러들어오겠지만, 그것이 중년의 터널이라면 차라리 아주 길고 길어 중간 중간 무지개 조명도 달려있었으면 좋겠다.
모든 이들에게
그대의 이름이
얼마나 감동적인지.
즐겁고 슬프고
기쁘고 화가 나고
두렵고 평화로운
장대한 서사가 펼쳐지는
지상최고의 인생드라마.
그대의 이름이리라.
-청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