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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한 만족감

어쩌면 모두의 이야기

by 청유

딱 한번 펼쳐졌던 책이 있다. 흔한 마케팅 도서다.

3년 전 서점에서 겨우 몇 장의 면접으로 간택되었다. 어쩌면 표지디자인과 카피의 승리였을지 모른다. 당시 브랜딩을 배워야 한다는 간절함으로, 표지의 메인카피가 열 배는 확대해석 되었던 것 같다.


그 책은 지금도 항상 눈에 띄는 명당자리에 있다. 입주 때부터 책꽂이 로얄층을 확보했지만, 이 집에선 간보는 이조차 없다. 어쩌면 서점에서보다 더 쓸쓸할 것이다. 그때는 필요할 줄 알고 샀었는데 그보다 더 필요한 건 항상 새로이 생겨났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아직도 읽어볼 마음은 없다. '언젠가'라는 건 회피의 대명사일 뿐이다. 완독하지 않았으니 버릴 수 없다는 고집이 함께 평행선을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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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런 물건이 꽤 있다.

쓰지도 않을 것을 버리지도 못한다.

꽂아두는 것만으로 위로가 된다는 신앙적 찬양이 아니다.

소장만으로 왠지 멋스러운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이라면, 그건 반쯤 맞는 것 같다. 눈에 띌 때마다 급습하는 공허함에 착시를 준달까. 열등감 내지 자괴감이 아니라고. 이것은 지난 글 "가능성중독"과 매우 비슷한 결을 가졌다. 이루진 않았으나 이룬 것 같은 느낌을 취할 수 있는 것. 이 능동적 허영에 질질 끌려 앞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어딘가에 밝히기는 부끄러운 사실이지만, 어쭙잖게나마 살아내는 것 자체를 부끄러워할 건 아니지 않은가.

그 책을 끝내 읽게 될지, 혹시 이사라도 할라치면 버리게 될지 모르겠다. 괜한 소비를 했다고 결론이 나버리는 게 자존심이 상할테니 계속 들고 갈 확률이 더 높을 것 같긴 하다.



이 치졸한 자의식이 요즘 나를 버티게 했다. 글쎄, 음..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듯한 단어 선택에 어떤 이는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사실 나만이 아닌 모두의 민낯이라는 걸 이제는 조금 안다. 다만, 어느 부분에서 드러날지는 각자의 성향에 따를 것이다. 위와 같이 때로 오랜 착각으로 물든 물건이 나를 지탱해 주기도 하므로, 브런치스토리에 감겨 있는 작가란 호칭 역시 나에겐 착각을 포장해 주기에 더없이 좋았다.


어떻게든 착각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은 태도로 드러난다.

주로 글소개를 위한 글을 써왔던 지난 기획을 한동안은 지속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최근 몰두하기 시작한 경험들을 글로 써보고자 머리를 굴려봤는데, "글쓰기는 운동과 같아서...근육을 기르는 어쩌고 저쩌고.."하던 브런치팀의 잔소리만 맴돌 뿐이다. 아, 뭐라도 계속 썼어야 했어-라는 후회는 좀처럼 유턴이 안된다. 이러면 착각을 유지할 수가 없는데. 흐흣.


이쯤 되니 착각 속에 머무를 때의 내가 한심하게 느껴진다. 기다리던 분들이 있었고, 그들에게 화답하던 나도 있었는데 그 모든 걸 본의 아니게 무시하고 있던 느낌이다. 정당했으나 당당하지 못했다. 좀, 내게 괴팍하지 않았나 싶다.


스크린샷 2025-08-05 155537.png 김챌수는 이제 내가 다른 사람인 척 해도 나를 알아본다.



이유라면 사실 아주 많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살림이 크고, 매일 18인분의 식사를 챙겨야 하며, 아이들이 한번씩만 나를 불러도 네 번을 움직여야 한다. 입지를 다지기 위해 전시와 공모전을 쉴 새 없이 달리고 있고, 한글굿즈 런칭을 위해 챌수씨와 시도때도 없이 머리를 맞대고 있다. 아파도 안아파야 하고, 졸려도 안졸려야 한다.


그래도 매일 최소 한번씩은 브런치스토리에 접속했다. 괜히 작가의서랍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뭐라도 고쳐올릴게 없나 살폈다. 그런데 막상 자리에 앉으면 세 줄을 넘기지 못했다. 줄지어 있는 현실임무들 앞에서 완벽한 문장은 태어날 수 없었다. 대충 일기처럼 쓴다는 것은 나에게 리만가설(*)보다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보아, 나는 항상 정리된 서랍을 원했던 것 같다. 글쓰기를 버겁게 만드는 완벽의 강박(이라고 하면서 완벽한 적은 한번도 없었음), 그 마음이 정거장 사이를 멀어지게 만들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내가 착각 속에서 느꼈던 만족감은 실제 만족이 아니라 생명유지장치였을까. 그 위태로운 만족감이 과연 내게 평온을 주고 있었을까.

나에게 묻는다. 너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니? 일기조차 휘리릭 쓰지 못하는 강박이라면, 글짓기의 수준을 논하기 전에 글을 쓸 수가 없는 사람이 아닐까. 칭작의 고통을 마주하지 못하고 글의 무게를 다스릴 수 없다면, 완벽해야만 한다는 강박 또한 착각이지 않을까.


글의 품격을 지키고 싶었던 마음은 뒷방으로 물러날 때가 되었다. 누누이 고백했듯 뭐라도 될 것 같은 냥 입성한 브런치스토리는, "되는" 곳이 아닌 "하는" 곳이었단 점을 상기해본다. 착각과 멈춤이 모순으로서 유효해진 시점이다. 비로소 쓰게 될 나의 글에 부담을 덜어보도록 노력해야겠다.


오늘, 내 생일인데 이런 날에조차 품격 지키겠다고 글 하나 쓰며 참으로 피곤하다. 나는 매사 일을 크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로블록스 팝업스토어를 예약해 아들과 오붓이 데이트하겠다 해놓고, 어쩌다 보니 친인척이 모이는 대규모 행사로 만든 것이 최근의 능력발휘다... 젠장. (크게크게열매를 먹었읍니다)


어쨌든, 썼다.ㅎ 그리고 또 써야지.ㅎ





(*리만 가설(Riemann Hypothesis): 1859년 리만이 제안한 소수 분포에 대한 수학적 추측. 수학계 7대 난제 중 하나로, 해결 시 클레이 수학연구소에서 100만 달러의 상금이 주어진다.)


스크린샷 2025-08-05 155200.png 도움은 안되지만 말은 예쁘게 하는 김챌수




팝업스토어에서의 친인척 모임은 잘 헤쳐나가 보겠습니다.



★ 평소보다 영상이 좀 길어요. 1분25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오랜만에 정독해보니 참 좋네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푸슈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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