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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ns May 23. 2021

거미의 땅의 땅에 대한 짧은 글

  기억이 장소나 공간에 반영된다면. 시각매체는 이를 어떻게 볼 수 있도록 할 것인가? 그 기억이 (이 영화의 표현을 빌리자면) “거인들의 전쟁”의 기억이 아닐 때 그 접근은 조심스러워진다. 특히 로컬 스케일의 “사람들”의 기억조차도 되지 못하는, 오히려 그 “사람들”이 쉬쉬했던 “여자들”과 “아이들” ─ 이는 인접해있기도 하고, 중첩되기도 한다 ─ 이라는 “유령”의 기억이라면, 그 시각화는 보다 민감한 문제가 된다. <거미의 땅>은 그 재현과 번역의 민감함을 인지하고 고민한다. 이에 더해 이 작품은 스스로의 고민을, 관객으로 하여금 이어지도록 한다. 혹은 이어지기를 요청한다. 


  다큐멘터리는 이 재현/번역 과정에 있어 아카데미의 연구윤리나 저널리즘의 보도윤리와는 유사하면서도 다른 윤리 체계를 갖는다. 이 과정에서 연구나 보도에 포함되었을 것들이 누락되기도, 누락되었을 것들이 포함되기도 한다. 우리는 옮겨지지 ‘못하는’ 것, 옮겨지지 ‘않는’ 것의 삼자를 고려하며 영화를 보게 된다. (이에 더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옮겨져야 했다고 작품이 판단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되기도 한다.)


  <거미의 땅>에서 ‘땅’은 중요한 요소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장소’인 이곳의 이름, 지명을 구태여 제시하지 않는다. 경기도 북부 정도로만 다루어질 뿐이다. 물론 로케이션 촬영을 진행했을 이 다큐멘터리가 촬영을 진행한 곳의 지명을 몰라서 누락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영화는 연구에서 밝혀야 할 (그리고 유사한 제재의 연구들이 실제로 밝히고 있는) 도시·군 단위의 제시를, 혹은 저널리즘의 보도윤리에 따른 A시, B군 따위의 익명처리를 진행하지 않는다. 영화가 목표하는 것은 단지 흐리게 만드려는, 혹은 흐트려 놓으려는 것이 아니다.


  영화의 첫 부분과 끝 부분에는 분식집이 등장한다. ‘시골’ 분식집에서 햄버거를 판다는 아이러니. 이 아이러니에서 지극히 한국적 로컬의 장소로 보이는 이곳 거미의 ‘땅’은, 실상 로컬리티에 붙어있더라도 비-성원, 혹은 비체들이 머물고 고통을 받은 장소라는 지점에서도 어쩌면 (공항이나 카페처럼 무국적 세련됨의 비장소로서 제시되는 곳과는 또 다른 의미의) 비장소일 수 있음이 드러난다. 영화가 소위 글로벌과 코스모폴리스의 것으로 흔히 ‘여겨지는’ 빠른 호흡을 택하지 않고 오히려 로컬리티의 것으로 ‘여겨지는’ 느린 호흡을 채택하였음에도, 이 아이러니에서 이 곳이 상처받은 이들이 모여들어 안정적으로 장소화되지 못하는 비장소임이 드러난다. 혹은 그 채택으로부터 ‘땅’은 더욱 비장소적으로 보여진다.


  작품 후반부에는 주한미군의 군사 지도가 나온다. 군사 지도를 다루는 카메라의 시점은 휴먼스케일에 있는 그 앞 부분에서의 카메라와 다르다. 오히려 군사 지도의 시점은, 그리고 이를 읽는 카메라의 시점은 신의 눈에 가까워 보인다. 신의 눈에서 의정부와 동두천, 한강과 같은 ‘장소’는 영어로 된 지명으로 읽힌다. 뒤이어 영화는 자기의 내부에 삽입된 내레이션을 통해, 의정부냐 혹은 동두천이냐 묻는 질문에 “아니요, 그렇지는 않아요. 비밀은 없어요. 어디든 거기가 그곳이니까요.”라고 응답한다. 작품 내내 보여졌던 폐허 장소에서, 동두천이나 의정부냐, 혹은 다른 도시냐의 세세한 구분은 중요하지 않아진다.


  오히려 영화는 지도에서 보여주었던 방향인, 한강 상류에서 하류 방향으로(동에서 서로) 나아가며 새벽의 파주 시내를 보여준다. 새벽은 ‘거미’들이 다니는 시간이었음에도, 한강의 최하류인 파주의 새벽에서는 (여기까지 도망쳐온) 비체들에게 더 이상 도망칠 곳은 없다. 그러나 그 곳은 장소로, 더 정확하게는 장소이기를 희망하는 신도시로 공사 중이다. ‘거미’들의 ‘땅’은 폐허가 되어 더 이상 살 수 없는 곳, 그리고 그로부터 도망쳐온 곳의 변모 속에서 바스러진다. 비장소는 비체의 온전한 도피처가 되지 못한다.


2020년 5월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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