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보니 나에게도 의지와 상관없이 여러 가지 부캐를 갖게 되었다.
엄마, 아내, 딸, 며느리, 직장의 구성원...
부캐들의 활동이 워낙 활발한지라 본캐가 설 자리는 점점 좁아져가고 있었다.
에너지 총량의 법칙. 물리학의 세계뿐 아니라 인간의 삶에도 적용되는 말이리라.
그 많은 부캐들이 '나'가 아니라고 할 순 없지만 '나'를 대표하는 온전한 '나'는 아니기에, 점점 희미해져가는 내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꽤나 힘든 일이었다.
별것 아닌 일에도 마음이 뾰족해진 날도, 건드려만 봐라 터트릴테다 전투 태세를 갖춘 날도, 톡 건드리면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릴 것 같던 날도, 노래 하나를 무한반복하면서 숨죽인 날도, 지나온 삶을 통째로 부정하면서 후회를 남발한 날도, 많았다.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은, 애석하지만, 엄마라는 부캐를 추가하고 난 후 더욱 휘몰아치게 되었는데, 그건 아마도 그것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가장 컸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친한 친구 손에 이끌려 시작하게 된 독서 모임에서 나는 내 본캐를 오랜만에 만났다.
공통의 책을 한 달에 한 권 정해 읽고 간단히 생각을 나누는 모임이었는데, 엄마라는 부캐의 터널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던 때라 처음엔 말이 통하는 '어른 사람'과 어울린다는 것이 좋았다.
그러다 읽은 책이 늘고, 책 읽는 시간이 늘면서 점점 책 자체에 흥미가 생겼다. 둘째 아이를 출산하고 모임이 끊겼지만, 단톡방에 올라온 책들을 찾아 기어다니는 아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틈틈이 책을 읽었다.
'아이가 잠들면 서재로 숨었다(김슬기)'의 저자도 육아의 도피처(?)로 시작한 독서가 삶을 바꿔놓았다고 한 것처럼, 내게도 작은 변화가 생겼다.
책을 읽는 동안, 온전한 본캐로 살아가는 시간을 확보했다.
그러다 용기내어 글쓰기에도 도전하게 되었다.
이렇게 글을 쓰다보니 글솜씨는 없지만, 허공에 떠다니는 나의 생각과 삶이 조금씩 정리가 된다.
나 자신에게 몰두하는 시간을 어떻게든 마련하면서 작은 행복을 느낀다.
글쓰기를 통해 삶을 돌아보고 과거의 나와 화해하기도 하고,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한다.
글을 쓰는 과정 자체가 나에게는 치유의 시간이자 자기 성찰의 시간이 되었다.
글쓰기 자체가 하나의 업이 되어 진짜 '작가'가 된다면 그것 또한 또다른 부캐가 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저 이 작은 과정을 즐기고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본캐로서 잘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의 서랍.
제목만 써 놓은 글, 단어 몇 개 끄적여놓은 글, 쓰다 만 글, 다 썼지만 발행을 못한 글 등 글의 조각들이 옹기종이 모여있다. 발행을 한 글이나 하지 않은 글이나 내겐 모두 소중하다. 본캐가 열심히 성찰하고 단어를 고르고 쓸 거리를 정하고 한 것들이니까.
누구나 자신의 본캐가 무엇인지 정의하기 어렵다.
수많은 부캐들처럼, 본캐로 살아가는 방법도 하나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조금씩이나마 시도를 한다면 본캐로서의 길을 내어갈 수 있지 않을까.
내겐 그것이 독서와 글쓰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