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주의 사회를 비판한'1984'와 스탈린 체제를 희화화한'동물농장'은 인도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식민 관료 생활을 한 조지 오웰의 대표작이다.
나는 '1984'를 먼저 읽고 '동물농장'을 이어서 읽게 되었는데, 각 작품의 인물과 주요 사건들을 1:1 매치시키며 읽으니 더욱 흥미로웠고, 그런 점에서 이 두 작품은 각각이 다른 작품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세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1984'가 이미 완성된 형태의 사회 속에서 소수의 지배층이 자신의 체제를 어떻게 유지시켜나가는지 드러난 작품이라면, '동물농장'은 그 체제가 어떻게 형성되어 완성되었는지 그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볼 수 있다.
즉, 시간 순서대로라면 '동물농장' 다음이 '1984'가 되는 것이다.
나는 두 작품을 크게 두 가지 부분에서 대응시키며 분석해보려고했다.
1. 사고의 제한
우선, '1984'의 모토는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다. 서로 상반되는 의미를 지닌 단어를 조합하여 체제 자체가 지니고 있는 모순을 보여주는 것에서 작가의 비판 의식이 정면으로 드러난다.
내가 주목하게 된 것은 '무지는 힘' 부분이다. 과거 우리 역사의 '우민화정책'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는데, 언어의 통제와 정보의 제한으로 사고를 단순화시키고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분석할 수 있는 통찰력을 완전히 차단함으로써 우매한 민중을 길러내고 그를 통해 권력을 독점하게 된다. '동물농장'에서 성실하지만 깊이 사고할 줄 모르는 동물들의 멘토 '복서'가 안타깝지만 우매한 민중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자네는 신어를 만든 목적이 사고의 폭을 좁히는 데 있다는 걸 모르나? 결국 우리는 사상죄를 범하는 것도 철저히 불가능하게 만들 걸세. 그건 사상에 관련된 말 자체를 없애버리면 되니까 간단하네. 앞으로 필요한 모든 개념은 정확한 한 낱말로 표현될 것이고, 그 뜻은 엄격하게 제한되며 다른 보조적인 뜻은 제거되어 잊히게 될 걸세. (중략) 언어가 완성될 때 혁명도 완수될 것이네.(1984, p.75)
일제가 한글 말살 정책을 펼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언어에는 언어 사용자의 사고와 정신이 담겨있기 때문에, 그것을 통제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통제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 된다. 소설 속의 사회에서도 언어를 단순화하여 사고의 폭을 좁힌다고 말하며 언어의 완벽한 통제는 혁명의 완수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동물농장'의 동물들 중 언어를 아는 동물은 거의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걸핏하면 잊어버리거나 배울 의지가 약한 동물이 대부분이다. 그들에게 7계명은 너무 길기에 모든 동물이 알기 쉽게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나쁘다"로 단순화하게 되고, 양들이 끊임없이 외치는 구호가 된다. 동물들은 7가지의 사고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한 가지 단순한 사고 안에 갇히게 된다. 결국 글을 아는 돼지가 권력을 장악하고, 모르는 다른 동물들은 돼지의 지배를 받게 된다. 동물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복서' 역시 무지했기 때문에 상황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결국 권력자의 입장에서 '무지는 (권력자의) 힘'임을 제대로 보여주게 된다.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부분에서 권력자들의 횡포와 그것을 장악해가는 다양한 과정이 드러나지만, 내게는 언어를 통한 사고의 통제가 가장 무시무시한 장면으로 다가왔다. 해당 부분을 읽어내려가고 있을 때는 지금 읽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잃을까봐 노심초사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2. 정보의 조작과 통제
'동물농장'에서는 동물들의 혁명 당시 세웠던 7계명을 아무도 모르게 수정해 간다. 7계명을 제대로 아는 동물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돼지들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정보를 조작하고 제한한다.
일례로, 외양간 전투에서 고양이가 적의 다리레 발톱을 꽂을 일이 권력자인 돼지 '나폴레옹'이 한 일로 둔갑하여 그를 영웅화하는 데 사용되기도 하며, 거짓 자백으로 희생양을 만들어 내부를 결속하기도 한다.
'1984'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극히 제한적인 일을 하며 자신이 맡은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 중요하다. 주인공 '윈스턴'은 '텔레스크린'의 엄격한 감시 속에서 주어진 일을 수행하는데, 그 일이 바로 정보의 조작이다. 그는 철저한 통제 속에서 세상에 없던 일도 만들어내고, 있었던 사람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으로 바꾼다. 이것들은 '타임지'를 통해 사람들에게 홍보되는데 이를 통해 작가는 언론 조작의 단면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개개인의 기록을 절대 남길 수 없으며, 기록은 권력층에서 제한하고 독점한다. 때문에 정보의 조작이 쉬워지고 사람들을 입맛대로 조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정보를 가진 이들이 우위에 설 수 있으며, 그들은 권력을 휘두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젊을 때도 나느 저기 쓰여 있는 글들을 읽지 못했어. 그런데 저 벽이 좀 달라진 것 같지 않아? 일곱 계명이 그대로 있긴 있는 거야?" (중략) 일곱 계명은 오간 데 없고 단 하나의 계명만이 거기 적혀 있었다. 그 계명은 이러했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동물농장, p.128)
두 작품의 결말은 모두 씁쓸하다. '동물농장'의 돼지는 인간과 결탁하였고, '1984'의 윈스턴은 끝내 '빅브라더'를 찬양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희망은 없는 걸까?
'동물농장' 결말에서는 돼지의 직립이라는 비현실적인 상황을 설정하여 독재를 실현한 인간의 모습을 추악하게 드러내며 독자에게 경계심을 불러 일으킨다. 저렇게 살았다가는 인간성을 잃은 돼지가 될 것만 같아 머리가 쭈뼛 선다.
'1984'에서 개인의 기록물을 남기는 것은 금지사항이지만, 윈스턴은 감시의 눈을 피해 일기를 쓴다. 성공여부를 떠나 과거를 기록하고 미래에 그것을 전달하고자 하는 행위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 사랑이 통제된 사회에서 연인과 밀회를 즐기며 창밖을 통해 바라보는 노동자의 모습에서 희망을 보기도 한다.
'1984'에서는 결말로 가는 과정 속에서, '동물농장'은 결말에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들을 드러낸다. 그리고 '1984'에서는 그것에서 끝나지 않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요소들을 잊지 않는다.
열두 개의 화난 목소리들이 서로에게 고함을 치고 있었고, 그 목소리들은 서로 똑같았다. 그래, 맞아, 돼지들의 얼굴에 무슨 변화가 일어났는지 이제 알 수 있었다. 창 밖의 동물들은 돼지에게서 인간으로, 인간에게서 돼지로, 다시 돼지에게서 인간으로 번갈아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누가 돼지고 누가 인간인지,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이미 분간할 수 없었다. (동물농장, p.134~135)
평등이 있는 곳에 올바른 정신이 깃들 수 있다. 조만간 그런 세계가 와서 힘이 의식으로 변할 것이다. (중략) 반드시 노동자들이 각성할 때가 올 것이다. 어쩌면 천 년이 걸릴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그때까지 당이 갖지도 못하고 말살시킬 수도 없는 생명력을 새들처럼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전하며 모든 불평등에 맞서 꿋꿋이 살아남을 것이다. (1984, p.301~302)
안타깝게도 두 작품 속 사회는 현대 우리의 삶 속에 아직 남아있다. 작품의 모티브가 된 시대는 끝났지만, 권력과 그것을 추구하는 인간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존재할 것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무지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무관심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경계하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