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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비꽃 Mar 21. 2022

가방의 의미

옳고 그름 사이에 담긴 의미에 대하여

“똑바로 세!”

“열, 열하나, 열둘, 열셋”


교무실이었다. 담임의 자리가 구석이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날 담임에게 15대를 맞았다. 사유는 학교 규정이 어긋나는 가방을 메고 왔다는 것이었다. 사건은 이러했다.


학교는 당시 유행하고 있던, 여성용 작은 가방, 일명 ‘쌕(sag)’을 단속 대상으로 두었다. 몇몇 친구들과 나는 학교 앞 슈퍼의 협조(?)로 학교용 가방을 슈퍼에 맡겨두고, 등교할 때마다 가방을 바꿔 매는 방식으로 학교의 단속을 피했다. 그날도 여느 날처럼 흡족하게 쌕(sag)을 매고 슈퍼로 향했다. 무슨 일인지 슈퍼 문이 잠겨 있었다. 문을 두드리고 흔들기를 수차례 하다 어쩔 수 없이 ‘쌕’을 메고 학교로 향했다. 예상한 그대로였다. 규정을 벗어난 ‘쌕’은 학생주임인 담임에게 발각되었고, 가방은 압수됐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담임은 조례 후 교무실로 오라고 통보했다. 교무실 구석에 있는 담임의 자리에서 엎드려뻗쳐 자세를 취했다. 담임의 훈계가 이어졌고, 엉덩이를 맞았다. 15대. 당구 큐대는 부러졌다.


나를 더 비참하게 했던 것은 교실로 돌아와 알게 된 사실이었다. 나보다 늦게 교무실로 소환된 친구가 15대를 다 맞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한 대 맞은 뒤 엄살을 피우며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더니, 담임이 체벌 횟수를 줄여주었다고 전했다. 그 아이는 나보다 체벌을 당한 경험이 많았고, 나는 체벌 경험이 전무했다는 것이 이런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일까. 역시 경험이 중요했다. 융통성 없던 나는 자세가 흐트러지면 더 맞을 줄 알라는 담임의 호령에 입술을 깨물어가며 자세를 지켰고, 성실하게 수를 셌다. 그 성실함이 괘씸죄를 더한 걸까. 약자의 자세에 능하지 않았던 나는 억울했다.


내 몸 위에 이런 규모의 시퍼런 멍은 처음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화장실 문을 잠그고 엉덩이를 천천히 살폈다. 처참했다. 당구 큐대가 엉덩이에 붙어있는 듯 긴 타원형을 남기고 그 둘레에 멍이 들었다. 엄마에게는 말하지 못했다. 규정을 어긴 것은 사실이었고, 선생님한테 맞고 다니는 것을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나만 속상하고 말자 했다.


이 흉측한 멍이 내게 준 것은 뭐였을까? 학생의 자세에 대한 고찰? 반성과 뉘우침? 내게 남은 건 모욕과 수치심뿐이었다. 너무도 크고 선명한 멍 자국이 사라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결렸다. 매일매일 아주 또렷하고도 분명하게 그 변화의 양상을 살폈다. 그 정도가 담임이 내게 준 전부이다. 한동안 의자에 앉아 있기도 힘들 정도의 통증을 느꼈다. 반쯤 걸터앉은 자세로 수업을 들었다. 나의 자세를 보며 담임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가 나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은 뭐였을까. 어쩌면 그는 아무 생각도 없었을지 모른다.


학교는 학교생활규정을 정하고 학생들에게 그것을 따르라고 일방적으로 요구한다. 그들이 정한 옳고 그른 생활규정을 학생들은 보지도 못한채 동의한다. 아니 동의해야 한다. 또 규정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은 체벌에 대하여도 그저 따라야 한다. 그 여성용 작은 백팩(backpack)은 왜 ‘그름’으로 분류된 것일까?


학교가 학생 복장 규제를 하는 이유로 드는 것 중 하나는 학업 연관성이다. 학생들의 외모에 대한 욕구를 억제하는 것이 학교 전반의 면학 분위기 조성에 도움이 되며, 학생 개개인의 시간이 낭비 없이 학업에 사용될 수 있으며, 여러 가지 탈선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은 단지 ‘관념’ 일뿐이라는 것이다. 어떠한 실증적인 연구도 복장 자유가 학습을 방해하며 수업 집중도를 떨어뜨려 교내 면학분위기에 악영향을 준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그들이 정한 옳고 그름 사이에 대체 무엇이 있었던 것일까? 학교 전반의 면학분위기 조성이라는 명분을 건 규제는 단지 통제하기 쉬운 환경을 만들기 위한 장치는 아닌가. 일부 학생들을 본보기로 삼아 전교생에게 공포감을 심어주는 것. 나아가 굴종시키기 좋은 아이들로 만드는 것. 약자의 자세를 내면화하는 것. ‘그름’으로 분류된 작은 가방이 말하는 것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어떤 교사는 체벌금지를 교권 상실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묻자. 체벌로 확립된 교권에 어떤 권위가 있냐고. 얼마나 더 초라해지기를 원하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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