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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비꽃 Mar 18. 2022

걷기를 지속할 것.

가장 오랫동안 연속으로 걸은 시간은 다섯 시간이다.

안다. 인상을 줄 만큼의 대단히 긴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나 1시간, 2시간의 걸음은 셀 수가 없다.

맞다. 나의 걸음은 강력하진 않으나 지속적이다.


본격적으로 ‘걷기의 날들’이 시작된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이다.

이사를 했고, 전학을 했다. 그때 처음으로 홀로 버스를 탔다. 두렵지만 짜릿했다. 짜릿함에 조금씩 무뎌질 즈음 버스를 타는 대신 걷기 시작했다. 작은 발걸음으로 종종종. 4년 가까이 40분을 걸어 학교를 다녔다. 그사이 나의 걷기 메이트는 여러 번 바뀌었다. 그들의 경로에 맞춰 나의 경로가 재조정되기를 반복했다. 함께 걷는 시간이 좋았고, 그들과 헤어지고 혼자 걷는 시간 역시 좋았다.


비가 오던 어느 날이었다. 하교 길 우산을 펼치려던 친구와 나는 순간 마음이 찌릿 통했다. 그리곤 우산을 손에 든 채 빗속에 발을 내디뎠다. ‘투둑!’ 하고 머리 위에 떨어지는 비가 차갑게 느껴지다, 뺨을 타고 내려오는 빗물에서 자유함을 느꼈다. 세상 위에 온전히 나로 서 있는 느낌이었다.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걸었던 자유의 순간이 또렷이 내 안에 남았다.


고등학생이 되고 다이어트를 하는 언니를 따라 나도 괜히 덩달아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언니는 극단적인 식이요법을 택했다. 밥 대신 콩을 먹었고 반찬으로 물미역만 먹었다. 나 역시 언니를 따라 콩을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물미역 대신 나는 운동요법을 추가했다. 그렇게 중랑천을 걷기 시작했다. 걷기의 목적은 다이어트를 넘어섰다. 음식을 소화시키기 위해 걷고, 감정을 소화시키기 위해 걸었다. 생각에 집중하기 위해 걸었고 모든 상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걸었다. 통화를 하며 상대의 하루를 나눠 받았고, 내 하루를 나누 주기도 했다. 음악에 흠뻑 젖어들기 위해, 라디오 사연에 집중하기 위해 길을 나서기도 했다. 또 어느 날은 그저 걷고 싶었다.


첫 남자 친구와 연애를 시작하고, 중랑천을 걸으며 손이 시리도록 통화를 했다. 남자 친구와 전화를 끊고 설레는 마음과 함께 들었던 음악들. 낮게 퍼진 가로등의 붉은빛과 까만 밤의 달빛. 그 빛을 받아 반짝이며 흐르는 물, 또 그 소리까지. 사랑에 빠진 나를 위해 세상 존재하는 듯했다. 그 사랑이 울음이 되어 버린 날, 음악과 빛과 물과 소리는 나의 슬픔을 배가 시켰다. 덕분에 울고 싶은 만큼, 아니 그보다 더 울었다. 울음소리가 물소리와 함께 흘러가면 다시 울음을 내에 물과 함께 보냈다. 그러기를 수차례. 실컷 울고, 눈이 퉁퉁 부은 채로 집에 돌아오면 추위 때문인지 바로 잠이 들었다.


어느 날 학교에 가기 위해 지하철역을 갈 때였다. 불현듯 내가 얼마나 걸을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곤 걸었다. 세 시간이 넘어서는 순간부터 발이 아파 왔다. 그 후로 두 시간을 더 걷다 결국 지하철을 탔다. 오전 수업은 들을 수 없었고, 오후 수업만 겨우 들었다. 그날 왜 그런 객기를 부렸을까. 몸이 부서지고 싶었던 걸까? 그날 나의 마음을 움직였던 이유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언제까지 더 걸을 수 있을까?, 어디까지 더 걸어볼까? 하고 묻던 나의 마음과 내 주변을 걷던 사람들이 기억난다. 그 순간 길 위의 내가 전부였다.


여행을 가면 아침 산책을 한다. 낯선 나라에서 낯선 풍경들과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걷는 것은 설레지만 두렵기도 하다. 길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 누가 내게 다가올까 하는 두려움. 낯섦에 대한 두려움. 그럼에도 걷는다. 두려움을 나는 즐기는 것일까?


아침의 길은 아침이 걷힌 후의 길과는 다른 모습이다. 한가로이 산책을 즐기는 사람도 있고, 바쁘게 오늘 하루를 준비하는 사람도 있다. 또 어젯밤을 채 정리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모두가 아침의 무겁지만 상쾌한 공기를 나눠마신다. 아직 채 뜨지 못하고 가라앉은 아침 공기의 느낌이 나는 좋다. 그래서 서로가 반갑다.


내 걸음은 그렇게 언제나 함께였다. 동반자가 있었고, 이야기가 있었다. 음악 있었고, 사랑이 있었다. 눈짓이 있었고, 반가움이 있었다. 두렵지만 설렜고, 따뜻했다가도 한없이 한없이 외롭고, 괴롭고, 두려웠다. 그러나 분명히 자유가 있었고, 그리고 온전한 내 자신이 있었다.


나는 매 순간 인생이란 길 위를 걷고 있다. 나는 나의 인생이 강력하고 인상적이기보다는 잠시 멈춤이 있더라도 지속적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누군가와 함께여도 좋고, 철저히 혼자라도 좋다. 그 순간에 집중하며 걸어가는 모든 시간들에 감사함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함께 걷고 있는 이들을 놓치지 않고 응시할 것이다. 또 나 자신을 바라보기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하찮은 날에도,

세상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날에도,

걷기를 지속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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