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비꽃 Apr 12. 2022

아이를 키운다는 것.

빌어먹을 '안눕'의 시작과 끝,




아이를 키우는 한 연예인이 말했다.

“육아는 매일매일 내가 별로인 사람인 걸 확인하게 하고, 보고 싶지 않은 내 끝을 보게 해요”


아이를 키우기 전까지는 몰랐던 나를 마주한다. 연애하며 다 보았다고 자부했던 내 바닥이 무려 퀴퀴한 지하층까지 있었다. 그 바닥을 같이 확인 한 사람이 내 뱃속으로 난 내 아이라니, 아이에게 들켜버린 내 바닥은 너무나 깊고, 어둡고, 축축하고, 처참했다.


아이는 7개월에 접어들자 통잠을 자기 시작했다. 이제 수면교육이 필요하겠다 싶어 집어 든 책이 『베이비 위스퍼』다. 당시 신생아를 키우는 집이라면 한 권씩 있던 책. 저자는 영국에서 태어나 간호학과를 졸업했다. 아기들의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신체 언어를 관찰하며 아기들의 요구를 정확히 읽어내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5000명이 넘는 아기들을 보살폈고 유명 할리우드 배우들이 앞 다퉈 육아 의뢰를 한다니 믿을만해 보였다. 그녀는 친절하고, 상세했다. 그러나 그녀의 친절한 안내로 내가 도착한 곳은 지옥이었다.


책은 아이의 잠 신호를 빠르게 파악하고, 잠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 뒤, “안눕”을 하라고 했다. 울면 안아주고 그치면 눕히기. 이 안눕을 아기가 잠들 때까지 무한반복할 것. 그날부터였다. 지긋지긋한 안눕의 시작으로 나의 지옥문이 열렸다. 아기는 눕히기 무섭게 울었다. 울음을 달래고 눕히면 미세한 고도를 감지하듯 몸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다시 울었다. 다시 안고 달래고 눕히고, 또다시 안고... 허리와 팔이 부러질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나의 허리와 팔이 부러지고 있을 때, 아이의 신뢰도 부서지고 있었다. ‘엄마 저를 안아주세요. 안아주셨군요. 감사해요. 따뜻한 엄마 품에 안기니 이제 좀 마음이 나아졌어요. 아니, 다시 저를 내려놓으셨나요? 엄마 다시 안아주세요. 제가 울지 않으면 눕히시는군요. 이제 엄마를 믿을 수가 없어요. 제가 목아 아파도 계속 울기를 바라시나요? 엄마 저를 사랑하시는 건 맞나요? 이제 엄마를 더 이상 믿을 수가 없어요.’


아이는 나의 행동에서 어떤 메시지를 받았을까? 아이의 울음소리가 더 거칠고 처절해졌다. 불행히도 나는 어떤 이성적 판단도 어려운 상태였다. 공포에도 가까운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이 빌어먹을 “안눕”을 그쳐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단지 이 괴로운 울음의 소굴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매일 같이 찾아오는 아침이 두려워졌다. 아이의 울음소리와 나의 괴성 소리가 뒤섞이며 나의 바닥은 계속해서 새로운 지하층을 만들었다. 그즈음 남편도 내 모습에서 불안을 느꼈던 모양이다. 그는 당장 책을 갖다 버리라고 했다. 아이는 다 다르다고, 아무리 5000명을 보살폈대도 우리 아이는 보살핀 것이 아니지 않으냐고 물었다. 그의 물음에 답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힘들게 해온 모든 것들이 다 허사가 되게 할 수 없었다. 조금만 더 이 빌어먹을 “안눕”을 하면 아이가 혼자 자게 될 거라 믿고 싶었다. 나는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그저 기계처럼 안눕을 했고 작은 생명체는 나에게 괴로움만을 안겨주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되어 갔다.


아이의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아이를 토닥여도 전혀 소용없다. 목구멍까지 치솟은 감정이 통증을 일으켰다. 터져버릴 것 같은 마음이 아이를, 이성을 놓게 했다. 바닥에 떨궈지듯 떨어진 아이는 자지러지게 울었다.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한탄과 비난을 쏟아내며 나도 울었다. 두 울음은 뒤섞여 방안을 가득 메웠다. 진이 빠지도록 울고 나서 눈을 떠보니 한밤중이었다. 아이와 나는 지쳐 잠이 들었고, 퇴근한 남편이 내 곁에 잠들어 있었다. 어두운 방안에는 여전히 울음이 메아리쳤고 슬픈 공기가 가득했다. 깜깜한 방에서 눈물로 얼룩진 눈을 감고 자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가 안쓰럽고, 내가 안쓰러웠다. 아이의 보드라운 볼을 쓰다듬으며 남은 눈물을 다 퍼내었다. 눈물의 주머니를 다 말려 버리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날 아침, 아이가 나를 보며 웃는다. 밤새 울어 지치진 않았을까 하는 걱정에 얼른 분유를 먹였다. 아이의 솜털 같은 머리칼을 만지며 ‘어제 울었던 기억들을 모두 잊었을까?’하고 생각했다. 동시에 ‘아이도 나처럼 돌아올 저녁을 두려워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에 미치자 벌컥 울음이 쏟아졌다. 아이가 안 보게 눈물을 훔치고, 휴대폰을 들어 카톡을 보냈다.

“나 이제 수면교육 안 할 거야.”

“그래. 잘 생각했어. 고맙다.”

남편의 카톡을 보며 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남편의 짧은 문자 안에 그동안 내가 외면한 그의 괴로움이 보였다. 부끄러웠다. 몇 주간 아이와 보냈던 격렬했던 밤의 순간들을 떠올랐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저 내일은 더 나은 엄마가 될 것이라고 다짐할밖에.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별로인 나 자신을 매일매일 확인하는 것. 내 바닥이 끝없이 새로 파이는 것을 목격하는 것. 또 그것을 누군가에게 다 들켜버리는 것이다. 그래도 이 해맑은 아이를 낳은 사람이 나라는 것을 매일매일 확인하는 것. 자책과 반성의 시간을 갖으며 더 좋은 엄마가 되어주고 싶어 노력하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히 엄마의 자격이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나를 엄마로 키우는 것.




작가의 이전글 가방의 의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