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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언 Jun 01. 2023

카프의 무대 - 추민

문학신문 1958년 8월 21일

카프의 무대     

1932년 겨울-싸락눈이 덮인채 발자취도 끊어진 이슥한 서울 밤’거리, 북악산에서 내려치는 매운 바람을 맞받아 걸어 오던 나는 억지로 두루마기’자락을 여미며 골목길로 들어 섰다.


코’구멍 같이 답답하고 어두컴컴한 관수정 좁은 골목길에는 찌그러진 한 채의 집 들창만이 숨쉬고 있는 듯 불’빛이 까물거리고 동무들의 고리끼의 《밤주막》 가운데 나오는 노래소리가 은은하게 흘러 나왔다.     


밤이든지 낮이든지

감방문 어두어

언제든지 아귀들은 

아, 아, 아, 아…

들창으로 엿본다.     


엿보든지 마든지

담장은 못 넘어 

언제든지 아귀들의 

아, 아, 아, 아…

쇠사슬은 안 끊겨     


여기가 바로 카프의 직속 극단 《신건설》 사무실이며 우리들의 유일한 합숙이었다. 방 세는 벌써 다섯달치나 밀려 하루에도 몇 번씩 집주인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고 전기세는 독촉하다 못하여 아주 배선까지 떼 가고 말았다.


삼동 추위에도 불 한 번 때 본 일이 없고 굶기를 다반사 같이 하나 도대체 어디서 난 힘인지 누구 하나 앓아 드러누우 일도 없었다.


날세만 풀리며는 다시 일’자리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하다못해 뺑끼통을 들고 간판쟁이도 할 수 있겠건만 겨울이 되면 완전히 동면 상태에 들어 가고 마는 것이 우리의 생활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활이 곤난하고 경찰의 탄압이 심하기로서니 우리 수중에 장악된 무기(무대)를 한 시도 버릴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 계속되는 주림도 참을 수 있었으며 홑바지 저고리를 입고도 뻐젓하였다.


또한 일제의 어떠한 탄압과 주구들의 갖은 책동에도 굴하지 않고 이겨 낼 수 있었으며 그야말로 용기 백배로 의기 충천하였다. 그것은 바로 당시 김일성 원수의 항일 무장 투쟁의 소식이 방방곡곡에 전설적 사실로서 전파되었으며 그것이 우리의 투쟁에 있어서도 무한한 민족적 긍지와 승리에 대한 신심으로 고무하였기 때문이였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무대를 통하여 영광스러운 혁명 사업에 참가하여야 되겠다는 결의에 불타고 있었고 이 길은 우리들이 수행하여야 될 지상 업무라고 생각하였다.


내가 방안에 들어서자 동무들은 환성을 올리며 반가이 맞아 주었다. 밤낮으로 한 이불 속에서 생활하는 친구들끼리 무엇이 그리 새삼스러이 바가우랴마는 우리들이 계획하던 공연 사업에서 인쇄공장로동자 동무들과 학생써클원 동무들이 전’적으로 우리 사업을 원조하고 동원까지 하여 주겠다는 소식을 가져왔을 때 환성을 올리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날 밤 우리들은 목침 우에서 펄럭이는 초’불에다 손을 녹이면서 공연 준비에 대한 이야기로 밤 새는 줄을 몰랐다.


그 이튿날부터 우리들 중에 하나밖에 없던 외투까지 마저 전당 잡히고 사면 팔방 공연 자금을 획득하기에 분망하였다.


바로 이때 《우리동무》(당시 비합법 출판물) 사건의 검거 선풍이 불었다. 신고송, 리찬 동무가 검거되였으며 뒤’이어 강호, 김태진, 라웅 동무들도 검거되였다.


요행히 경찰의 검거망을 벗어난 나머지 동무들은 벼녕 가장하고 피신하면서도 계속 공연 사업을 준비하였으며 투옥된 동무들을 위하여 라디오 드라마 방송을 비롯하여 차입 자금을 만들어 보냈다. 경찰의 수사와 검거는 그칠 줄을 몰랐으나 그러나 우리의 무대 활동은 계속 전개되었다.


물론 극단 《신건설》의 시험 공연과 아울러 정식 창립 공연도 대성황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 후로부터 경찰들은 우리 무대의 공연 허가를 내어주지 않았으며 더욱이 잡지 《우리 동무》 사건과 아울러 도저히 합법적으로 공연 활동은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로부터 카프의 연극은 전술을 바꾸어 정면 무대를 진보적 학생층과 로동자 써클 지도 사업에 경주하였다. 그러기에 카프의 극단들은 일제 경찰에 의하여 합법성을 박탈 당하였고 또한 계속되는 검거로써 단말마적으로 탄압 당하였으나 그러나 카프의 무대는 더욱 군중 속으로 더욱 광범히 이동되었으며 전파되었다.


당시 카프 문학이 우리 나라 문단에서 주도적 조류를 이룬 거와 마찬가지로 카프의 예술도 또한 사상 예술적으로 당시의무대를 찬연히 장식하였으며 우리나라 예술 운동에서 자랑스러운 혁명적 전통을 이룩하였다.


어떠한 부정의와도 타협할 줄 모르며 어떠한 탄압 속에서도 굴할 줄 모르는 혁명적이며 애국적인 시대정신이 카프 무대에 살고 있었기에 제 아무리 일제의 탄압이 가혹한 환경 속에서라도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창작방법을 고수하여 왔었던 것이다.


×  ×


8월의 아침-나는 로력 동원의 차림을 하고 집을 떠났다.


아직 해’살도 채 퍼지기 전부터 고층 건물로 둘러 쌓여 가는 평양 거리는 움직이고 있다.


어제’밤도 지새도록 이곳 저곳에 기중기들은 돌이질을 하였고 간 곳마다 건설장에선 불꽃이 튄다.


하루’밤 사이에 또 달라진 거리와 거리를 거닐며 나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아침 바람에 활개치는 가로수와 같이 흥겨웁게 가슴을 쫙 펴며…


바로 저 집, 저 들창에서 새집들이 첫날 밤을 자고 난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언제 우리가 이런 행복을 맛보았더냐! 언제 우리가 이런 웃음을 웃어 보았더냐! 오직 우리 당, 우리 주권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살림은 나날이 늘어만 가노니, 나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날을 위하여 김일성 원수의 항일무장투쟁에 고무되여 모든 곤난을 참고 싸워 이겨내지 않았던가……


오늘의 무대는 완전히 우리의 것이 되고 오늘의 무대는 비단 국한된 극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거리와 전야가 모두 인민의 무대가 되었으며 모든 사람들의 생활은 그대로 예술로 되어 가고 있다.


우리가 밤도 낮도 없이 일하고 일하여도 피곤한 줄 모르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으며 나날의 살림이 즐겁기만 한 것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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