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신문, 1958년 8월 21일
내가 프로레타리아문학 대렬에 참가한 것이 바로 1928년이였는데 처음 만난 작가들로는 송영, 박세영, 윤기정, 리기영 등의 순서라고 기억된다. 송영과 박세영은 《별나라》사에서, 리기영은 《조선지광》사에서, 그리고 당시 조선프로레타리아예술동맹 서기장이였던 윤기정은 광화문통 네거리의 어느 비밀 사무실에서 만났었다. 고동색 두루마기를 입고 회색 중절모자를 쓴 키가 호리호리한 그 때의 윤기정의 상냥한 모습이 아직도 내 머리 속에 똑똑히 살아 있다.
《선비들만으로는 폭풍을 뚫고 나가기가 어렵습니다. 나는 동무의 가맹을 환영합니다…》
윤기정은 이렇게 말하면서 무척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다.
윤기정은 강직하고 친절하며 동지애가 두터운 분이였다. 나보다 여섯 살이 우인 그이지만 년장자에게나처럼 한결같이 겸손하고 존경하여 주기를 마지 않았었다. 나는 그와 정치와 문학에 대하여 토론을 거둡하여 언제나 일치한 결론, 즉 문학 예술은 군중 속에 깊이 뿌리 박아야 되며 정치와 분리될 수 없으며 쏘련을 향하여 배워야 하며 프로레타리아 국제주의의 기치를 고수해야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군 하였었다.
1931년 여름 《프로예맹 사건》으로 종로 경찰서에 잡혔을 적이었다. 당시 고등 경찰계에서 이름을 날리던 일본인 고등계 주임놈의 지휘 하에 놈들은 우리들에게 《비행기》 태우기와 물고문과 사매 다짐으로 《비밀 결사》와의 관계라든가 《비밀 활동》의 정황이라든가를 대라고 족쳤었다. 나는 취조실에 끌려 다니던 길에서 리기영, 윤기정 등을 펀뜻 볼 수 있었는데 그분들은 몸을 잘 가누지 못하도록 졸경을 치고서도 의기가 초침해 있지 않았다.
《얼마나 고생하시요?》
윤기정은 물에 젖은 중의 가랑이를 왼손으로 쥔 채 (류치장에서는 허리띠를 매지 못하게 하였다.) 나더러 이렇게 속삭였다.
그때 권환은 나와 한 방에 갇혀 있었다. 나보다도 몸이 더 쇠약한 그는 매를 몹시 맞았기 때문에 꼼짝 못하고 엎드려 있었지만 혁명적 의지를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들은 끝끝내 적에게 《비밀》을 대주지 않았다.
그 뒤 나는 소작 쟁의와 좌익 농민 조합 사건으로 수원 경찰에 다시 잡혔었는데 특히 이 사건을 취조하기 위하여 고등계주임으로 배치되여 온 놈이 바로 종로 경찰서에서의 야만적 고문을 하던 놈으로 《나는 너를 또 취조하게 되었다. 사람이란 묘한 운명에 부닥치는 수도 있다.》고 빈정대며 위협하면서 보다 더 혹독한 고문으로써 림하였던 것이다. 나는 마침내 감옥으로 넘어가지 않으면 안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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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다시 뒤로 끌고 가자!
1929년이였다. 수원에서 문예 강연회가 열리였었다.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여 있지 않은 당시에 강연회를 전취하는 것은 그리 용이한 일이 아니였다. 수원 지방의 로동 운동과 청년 운동의 일정한 지반이 없었다면 이 강연회는 전취되지 못했을 것이다.
수원 로동 조합 집행 위원장이 예술동맹의 일원으로 함을 아울렀던 사실도 특기할 만하다.
서울로부터 송영, 윤기정, 박팔양, 류완희 등이 연사로 출연하였었으며 강연회는 경찰과 반동 분자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다대한 성과를 거두었었다. 강연회를 끝낸 날 밤 적은 모임에서 우리들은 《수원 아리랑》을 격조 높게 불렀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 간다.
밭 가는 농부의 아리랑은 토지와 장리가 걱정일세.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 간다.
제사 공장 처녀의 아리랑은 시집갈 밑천이 걱정일세…》
우리들은 이런 형식을 통해서도 사회주의적 문학과 사상을 선전하였는데 경찰은 인민들더러 이 노래마저 부르지 못하도록 《취체》를 하였었다.
문예 강연회가 있은 뒤 우리는 또 경찰에 검속되였다.
1930년 봄엔 수원에서 제1회 프로레타리아 미술 전람회를 열었었다. 처음 열리는 계급적 미술 전람회인만큼 군중의 지지도 컸었고 경찰의 탄압도 이와 상반했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능히 이를 전취하였던 것이다. 역시 군중 운동과의 밀접한 련계 하에서만 그것은 가능하였었다. 국내 국제적으로 지지와 성원이 컸다. 일본 프로레타리아 미술가 동맹에서는 많은 작품을 보내주었다. (이 작품은 모조리 압수되였다) 그러나 프로레타리아 미술 전람회는 제 기일을 채우지 못하고 경찰에게 강제 폐쇄 되였으며 작품들을 몰수당하였고 주최자인 우리들은 또 체포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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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진이 《조선중앙일보》의 학예부장으로 있었던 당시 그 신문의 학예면에 우리들의 글을 많이 실릴 수 있었다. 권환이 《중외일보》에 있을때부터 그 신문을 우리들은 최대한으로 리용하였던 것이다.
우리들의 잡지가 차례차례 없어지게 되자 우리들은 더욱 발표난에 봉착하게 되었다.
더구나 《전주사건》(카프 검거 사건)이 일어난 뒤는 그런 곤난은 더하였다.
어떻든 문학 활동은 작품 발표 없이는 그의 기능을 발휘하기 어려운 만큼 이모 저모로 발표에 고심하였던 것이다.
진보적 문학을 고수 발전시키기 위하여 문학적 저수지와 경작지를 인민속에서 확장시킬 필요성이 제기되였을 때 1934년에 송영, 박세영, 리기영, 정청산과 함께 문학 잡지 《문학창조》 발간에 착수하였는데 나는 그의 일원이였으며 《별나라》 주필 안준식의 물질적 원조가 컸다. 그러나 이 잡지도 한 호를 내였을 뿐, 더 지속할 수가 없었다.
일제 경찰은 원고 압수, 체포, 고문, 감금할 뿐만 아니라 우리들을 인민들로부터 고립시키기 위하여 별의별 수단을 다 썼었다.
위대한 쏘련 군대에 의한 8.15 해방 후 비로소 공화국 분반부에서 우리 문학이 인민과 더불어 활짝 날개를 펴게 되었다.
회고하면 나의 오늘은 무한히 행복하다.
그러나 아직도 조국 땅 남반부는 일제 악당들을 대신하여 미제 강도배들이 강점하고 있다.
이 불청객을 남반부 땅에서 물러가게 하고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공화국 북반부에서 사회주의 락원을 더욱 아름답게 건설해야 할 것이다.
나의 창작을 이 속에서 더욱 우렁차게 올리게 할 것을 다시 한 번 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