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영화의 지도자 윤기정 1.
윤기정은 1903년 남대문시장에서 포목점을 운영하던 윤태희(尹泰熙)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적은 경성부 수창동 60번지이며 1932년 당시 주소는 수창동 142번지였다. 1934년 무렵에는 경성부 죽첨정 3 정목 334번지로 이사했다.
그의 형제 중 서양음악을 했던 남동생 윤기항(尹基恒)은 무사시노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과 첼로를 전공한 초기 서양음악인 중 한 명으로 경성양악대의 코넷 연주자로 있었다. 여러 악기를 능숙하게 다뤘던 그는 경성양악대에서 활동 후 경성방송국으로 옮겨 트롬본 주자로 있었다. 1937년에는 단성사에서 조직한 단성무대에서 강홍식, 임서방, 신불출 등과 함께 간부 단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는 해방 후 경성교향악단과 고려심포니, 서울교향악단, 해군정훈음악대, KBS심포니에서 연주자로 일하며 한국 음악계에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그 외 숙명여고를 나온 막내 여동생 윤정임(尹貞姙)은 언론인 홍원길과 결혼했다. 남편 홍원길은 해방 후 청주시장을 역임하는 등 정치인으로 활약했다.
윤기정이 살던 수창동은 지금의 내수동으로 세종문화회관 뒤편 동네이다. 그곳에는 그 지역 유지들이 성금을 모아 만든 보인학교가 있었으며 개울가 종침교(琮琛橋) 옆에는 감리교 계통의 종교교회(宗橋敎會)가 있었다. 어린 시절 윤기정은 그곳의 친구들과 어울려 지냈다.
카프에서 함께 활동한 동료들 대부분이 배재, 보성, 휘문 등을 다녔던 것과 달리 윤기정은 수창동에 자리한 보인학교에서 수학했다. 이 학교는 인재양성을 통한 교육구국을 추구했던 보인학회(輔仁學會)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1908년 보인학회 회원 김병석(金秉錫)이 운영하던 내수서당을 기반으로 학교 설립이 추진되었고 학회원들이기도 한 지역 주민들의 후원으로 개교하였다. 아버지 윤태희도 이 학교의 중요한 후원자였는데 1930년대 아버지가 이사로 있었던 동신주식회사에서는 매년 이 학교에 거액을 후원하였다.
학령이 되어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윤기정은 무엇보다 야구를 열심히 했다. 1910년대 조선에 본격적으로 야구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학생들 사이에 큰 인기를 끌었다. 1914년 발간된 『청춘』 제1호에는 「베이스볼 설명」이라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야구 규칙을 설명한 이 글은 당시 청년들 사이에 인기 있던 야구의 열기를 짐작하게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3.1 운동은 민족의식을 북돋는 계기가 되었다. 윤기정이 다니던 종교교회에는 전임 정춘수 목사와 당시 담임목사인 오화영 목사가 민족 대표 33인으로 참여하였으며 남궁억, 차미리사, 김응집 등 민족의식이 높은 교육자들이 청년부를 맡아 지도하였다. 이들 종교인의 영향을 크게 받은 청년 윤기정도 거리의 만세 소리와 함께했다.
일제는 3.1 운동의 주도 세력인 청년, 학생들의 집회와 시위를 극도로 제한하였다. 그 결과 스포츠와 같은 비정치적 목적을 표방한 단체들이 나타났다. 윤기정이 가담한 구광단(球狂團)도 그중 하나였다. 1919년 5월, 수창동과 멀지 않은 사직동 거주 학생,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조직된 야구 운동 단체인 구광단은 3.1 운동으로 집회와 시위가 불가능해지자 스포츠를 명목삼아 만들어진 단체였다.
구광단은 창단 이후 급속하게 회원이 늘면서 1920년 2월에는 소년부를 창설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이 단체의 핵심 인물인 18세의 윤기정은 같은 해 8월, 운동 지식뿐만 아니라 ‘청년에게 유익한 지식’을 전파할 목적으로 강의록을 발간하기로 하고 남대문의 굴정상점(堀井商店)에서 등사판을 구매한다. 하지만 이를 수상히 여긴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조사받게 된다. 다행히 조사 과정에서 등사판 구입 목적을 운동 단체의 활동을 위한 것임을 강변하여 석방될 수 있었다. 이처럼 일제의 조선인에 대한 감시는 극심했다. 그럼에도 함께 모여 민족의 장래에 대해 고민하는 학생, 청년들은 늘었고 이러한 열망은 보다 진보적인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3.1 운동 이후에도 학생들의 야구에 대한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1921년 8월 배재학교에서 개최된 전조선소년야구대회의 결승전에서 성서주일학교가 배재학교를 4:2로 승리하자 배재학교 학생들이 본부석을 때려 부수고 관계자들을 폭행하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야구의 뜨거운 열기가 불러온 불상사였다.
그런데도 윤기정은 야구와 같은 스포츠가 민족운동의 발판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특히 유소년들에게 스포츠는 신체를 단련하고 민족의식을 북돋는 중요한 활동이라 생각했다. 그는 1923년 6월 필운운동부 주최의 유년야구대회에서 심판을 봤다. 야구에 대한 애착과 야구를 통한 청년활동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 시기 깊은 우정을 나눴던 인물을 한 명 꼽는다면 단연코 김영팔이다. 그 역시 야구를 좋아했다. 1927년 『매일신보』에 실린 김영팔을 소개하는 기사를 보면, 그는 ‘야구를 누구보다 지지 않게 즐기며 실제 다이아몬드에서도 웬만큼 세련된 선수의 자격이 있으니, 장차 조선문인팀이 만들어지게 되면 빼지 못할 스포츠맨’이라고 소개할 정도였다. 그는 경성방송국 재직 시절인 1927년 우리말로 처음 야구 경기를 중계한 기록도 가지고 있다.
윤기정과 김영팔은 야구로 시작하여 연극, 문학으로 친교를 범위를 확대했다. 특히 연극공연에 관한 부분이 도드라진다. 윤기정이 1922년 6월 9일부터 5일간 단성사에서 개연한 민중극단의 <등대직>(3막), <환희>(3막), <주먹이냐>(1막)를 보고 감상평을 남겼다. 이 글에는 민중을 표방하고 나선 민중극단에 대한 기대와 달리 수준 낮은 공연에 대한 실망이 가득하다. 그는 ‘극의 본의(本意)는 적어도 순간순간의 예술적 위안과 찰나찰나(刹那刹那)의 말할 수 없는 어떠한 자극(刺戟)과 심절(深切)한 인상(印像)과 절대(絶對)에 의문(疑問), 이것이 극에 무엇보다도 귀중한 생명임’을 자각하라고 꾸짖으며 ‘조선의 셰익스피어’라는 윤백남의 무대연출에 대해 아쉬움을 표했다.
민중극단의 공연 평이 신문에 실렸을 무렵 극작에 관심이 많던 김영팔은 서울을 떠나 도쿄로 유학을 갔다. 윤기정은 그가 뛰어난 작가가 되기를 바라며 "보라! 어떤 영웅호걸을 물론하고 더구나 많은 문호 가운데에 방랑 생활에 쓰린 맛을 아니 본 이가 희소하지 아니한가. 과연 방랑 생활은 위대한 인물을 산출 할만치 이 세상에 가장 쉽지 아니한 생활이지만 무한한 가치가 있는 의식적 생활이라 아니 할 수 없다."는 영탄조의 송별사를 『매일신보』에 투고하였다.
야구와 문학으로 맺어진 김영팔 이외에 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일군의 청년들도 그의 인적 관계의 다른 한 부분이었다. 1923년 1월 27일 종교교회의 엡윗청년회에서는 “인류평등관”에 관해 가부로 나누어 토론회가 개최되었다. 윤기정은 부편에서 논쟁에 참여했다. 윤기정 이외에 토론자로 참여한 청년 중 가편의 강성주(姜晟周)는 일본 유학 출신으로 기독교 청년잡지 『청년』에 글을 실었던 문학에도 관심이 많은 청년이었다. 1931년 10월 이은상에 이어 잡지 『신생』의 편집을 맡았던 적이 있는 그는 윤기정과 함께 『신문예』의 동인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문단에 큰 족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 외 경성의학전문학교를 나와 의사로 활동한 이심종(李心鍾)이나 윤기정과 마찬가지로 부편에 있었던 강명석(姜明錫)은 전도사로 엡윗청년회 활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