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영화의 지도자 윤기정 2.
일본으로 떠났던 김영팔이 1923년 여름 방학을 맞아 형설회 순회공연단의 일원이 되어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가 일본으로 유학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1921년 6월 도쿄유학생이 중심이 된 동우회 순회공연단의 연극을 접하면서였다. 동우회는 순수 유학생 단체인 학우회와 달리 유학생과 노동자들의 공동의 이익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이 단체에서는 도쿄의 우리 고학생과 노동자들을 위한 합숙소를 짓기 위해 조선에서 자금을 모집할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연예단을 조직해 조선에서 순회공연을 꾀했다.
이 무렵 도쿄의 유학생 그룹 중 연극에 관심 있는 학생들이 모인 극예술협회가 있었다. 이 협회를 주도하던 인물은 목포와 개성의 부잣집 아들인 김우진(수산)과 고한승을 비롯해 조명희(포석)와 조준희(춘광), 최승일, 홍영후(난파), 마해송 등이었다.
동우회에서 방학을 맞아 전선 순회공연에 극예술협회가 참여해줄 것을 요청했다. 김수산과 고한승 등 부잣집 아들들은 자신들은 고학생이 아니라는 이유로 참여를 주저했다. 하지만 조명희 등이 노동과 학업을 함께 하는 고학생과 노동자로 일하는 우리 동포들을 돕는 의미 있는 일이라며 순회공연에 참여하자고 주장했다. 결국 조명희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고한승, 마해송 등 개성 출신들은 송경학회의 연극공연을 이유로 불참하였고 나머지 회원들은 동우회 순회공연에 참석하여 고학생들의 어려운 삶을 다룬 작품을 공연하기로 한다. 그리하여 조명희가 집필한 <김영일의 사>가 공연대본으로 선택되었고 이 밖에 홍난파의 <찬란한 문>, 김수산이 번역한 던세니의 <최후의 악수>가 공연된다. 여기에 연극공연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본 김수산이 음악 연주를 추가하기로 하여 음악가 홍난파, 윤심덕, 한기주 등의 독창과 연주를 공연에 포함시켰다.
동우회 순회공연단은 유학생들의 격정적인 연설과 조선인의 비참한 삶을 그린 연극과 음악을 통해 조선의 청년들을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했다. 윤기정과 김영팔도 김도산이나 임성구의 신파극이나 이기세, 윤백남의 개량 신파 공연이 아닌 동우회의 공연을 통해 연극의 사회적 역할을 확인했다. 가세가 좋지 못한 김영팔은 이들의 공연을 보고, 이들과 만나 도쿄에서 일하며 공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유학을 생각했다. 윤기정은 그를 응원해 주었다.
윤기정의 배웅을 받고 서울을 떠난 김영팔은 도쿄에 도착하여 새로운 세상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는 우선 극예술협회를 찾아 단원이 되기를 청했다. 당시 극예술협회는 동우회 순회공연 후에 큰 변화를 맞았다. 유부남이던 김우진은 순회공연 중 집안 어른들에게 윤심덕과의 치정 관계가 발각되면서 단체를 떠나게 되었다. 그러자 조선의 연극 발전을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넣겠다는 김우진의 약속 또한 무산되었다. 김우진과 윤심덕에 관한 소문은 퍼져나가 유학생 남녀의 부도덕한 윤리 문제로 확대되었다.
조선으로 돌아간 조명희를 비롯해 회원 일부가 탈퇴하고 새로운 단원들이 입단했다. 김영팔이 극예술협회에 가입하던 때가 바로 이러한 변화의 시기였다. 니혼대학교에 적을 둔 그는 극예술협회원 중 가장 가난한 축에 들었다. 조준희와 함께 우유배달, 신문배달, 인쇄직공을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했다.
동우회가 발전적으로 해소된 후 재일 조선인 고학생 단체인 형설회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조시가야(雜司谷)의 일화청년회관 자리에 2층 양옥으로 된 형설회 회관과 기숙사를 짓기로 하고 순회공연을 통해 자금을 조달할 계획을 세운다. 이를 위해 동우회 순회공연에 참여한 극예술협회에 공연을 부탁한다. 새롭게 재편한 극예술협회에서는 형설회 순회공연에 참여하는 대신 남녀의 애정 문제가 발생할 여지를 차단하기 위해 단원들 전부를 남자들로만 한정했다.
형설회의 1회 공연은 일본 도쿄의 스루가다이(駿河台) YWCA회관에서 있었다. 조춘광 작 <4인 남매>, <개성에 눈 뜬 후>, 고한승 작 <장구한 밤>과 같은 작품이 공연되었다. 이 중 <4인 남매>는 혁명 사상을 가진 진보적 남녀 청년들의 반일 투쟁을 다뤘으며 <개성에 눈 뜬 후>는 개성이 환경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환경이 사람의 개성에 변천을 가져온다는 줄거리로 최승일이 혁명가 역, 김영팔이 어머니 역을 맡았는데, 김영팔의 연기는 관중들의 큰 호평을 받았다.
스루가다이 YWCA회관에서 있었던 공연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수익금 일부는 공사 시작을 위해 회관 건축 계약비로 사용하였고 나머지 수익금을 가지고 1923년 7월 5일 부산에서부터 삼남지역을 돌며 순회를 시작했다. 형설회의 연극공연은 시작부터 큰 화제를 몰고 왔는데, 7월 20일부터 23일 3일간 서울의 단성사에서 공연 후 평양과 인천, 진남포, 원산 등 각 지역에서도 공연한 후 예정에 없던 지역까지 공연을 추가하는 등 큰 인기를 끌었다. 순회공연을 마치고 8월 22일 서울로 돌아온 이들은 해산식을 했다. 형설회의 공연은 수익에 있어서 큰 성공을 거두어 공연비를 제하고 1만 원을 도쿄로 송금할 수 있었다.
윤기정은 서울에 온 순회공연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김영팔을 만나 회포를 풀었다. 그를 통해 극예술협회의 동료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야구와 연극에 관심이 많은 최승일이나 고한승, 조춘광 등과는 이야기가 잘 통했다.
형설회 연극단 단원들이 일본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던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일어났다. 도쿄는 잿더미가 되었고 형설회 회관까지도 화염 속으로 사라졌다. 도쿄로 보낸 1만 원의 수익금도 연기가 되었다. 학업을 위해 도쿄로 돌아가기로 한 사람들은 조선인에 대한 학살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에 발이 묶였다. 김영팔은 도쿄로 돌아가기를 포기하고 인쇄소의 문선공으로 취업하였다. 윤기정은 도쿄로 돌아가지 못한 김영팔의 동료들과 친구가 되었다. 이들과 교유하며 본격적인 창작을 시작하였다.
1924년을 앞두고 윤기정과 친구들은 9명의 동인을 규합하여 순문예 월간잡지 『신문예』를 발간할 계획을 세운다. 동인으로는 윤기정을 중심으로 한 이계훈, 김준호, 강애천(강성주) 등 경성의 문학청년들과 극예술협회의 최승일, 조춘광, 고한승, 유도순 그리고 최승일의 막역지우인 심훈이 참가하였다. 잡지의 장정은 토월회 공연을 통해 심훈의 친구가 된 안석영이 맡았다. 발행소는 시내 황금정 2 정목 59번지에 두었다.
1924년 2월 발간된 창간호에는 최승일의 희곡 <배참자>, 유도순의 시 <삶에 눈 뜸>, 윤기정의 장편소설 <표랑의 혼>, 고한승의 시 <신비의 나라>와 동화 <국기소녀>, 심훈의 시 <목숨의 행진곡>과 희곡 <선술집>, 김준호의 소설 <떠나가는 사람>, 강성주의 시 <어린 혼의 방랑>이 수록되었다. 월간잡지를 내세운 만큼 1924년 3월에는 2호가 발간되는데 이때 9인의 동인 중 창간호에 참여하지 않은 조춘광이 빠지고 대신 유운경이 참여하게 된다.
『신문예』는 2호를 마지막으로 발행이 중단되었으며 현재 2호만 근대서지학회 오영식 선생이 소장하고 있다. 이 잡지에 실린 윤기정의 <표랑의 혼>은 그의 작품 중 가장 먼저 발표된 장편소설로 아쉽게도 일부만 남아 있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