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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언 Feb 23. 2024

안현철 감독과 국립영화촬영소

책방 노마만리 이야기 31.

박사과정에 들어온 후 한국영화사 연구에 보다 큰 흥미가 생겼다. 이 시기 석사논문을 쓰면서 미진했던 부분에 대해 관련 인물들을 만나 인터뷰를 했다. <민족의 절규>를 만든 안경호 선생 외에 <어머니의 힘>(1958), <인목대비>(1962) 등을 연출한 안현철 감독도 만났다. 


안현철 감독(1928-2020)


안현철 감독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석사논문을 쓰면서 영상자료원에서 발간한 한국영화 구술총서 “한국영화를 말한다”에 안현철 감독이 북한의 국립영화촬영소에 근무했다는 내용을 발견하면서 부터이다. 해방 후 북한영화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해 열심히 문헌자료를 찾아 논문을 쓰고 있었는데, 실제 그곳에 근무했던 분이 남한에 계시다니 꼭 찾아뵙고 이야기를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어떻게 안현철 감독의 연락처를 알아내 연락을 드렸다. 당시 감독님은 수유리 4.19탑 근처에 거주하고 계셨는데 그쪽에서 만나 인근 식당에서 반주를 곁들인 식사를 하며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2007년 가을쯤이었다.


나는 감독님이 어떻게 북조선국립영화촬영소에 입사할 수 있었으며 촬영소의 조직과 안현철 감독님이 기억하시는 촬영소의 모습 등에 대해 여쭸다. 안현철 감독은 촬영소 경비에게 뇌물을 주고 연구생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촬영소 옆에는 밭과 오리농장이 있어서 촬영소 직원들이 농사도 짓고 오리도 키웠다고 했다. 감독님은 직접 평면도를 그려가면서 촬영소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설명해 주었다. 또한 <내고향>의 촬영을 맡았던 고형규와 조명을 맡았던 송인호가 우리말을 거의 할 줄 모르는, 어려서부터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일본영화계에서 활동하다가 해방 후 조선으로 건너온 분이라는 사실도 알려주었다.


안현철 감독이 기억하고 있던 평양의 국립영화촬영소 평면도


안현철 감독은 1949년 연구생으로 입사하여 주인규가 연출한 <초소를 지키는 사람들>(1950)의 제작에 참여하였다. 나는 주인규에 대해 기억나는 게 있냐고 여쭸더니 민청 조직부장이던 미술과 여성과 연애를 했는데 이게 소문이 이상하게 나서 총장실로 불려가 면담을 했던 적이 있었다며 크게 혼날 줄 알았는데 몇 마디 묻고는 큰 문제를 삼지 않았다고 했다. 그 때문인지 주인규에 대해서는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촬영소의 실권은 총장인 주인규가 아니라 당에서 파견된 정치부원이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안현철 감독은 북한청년단이라는 지하단체의 멤버였다. 평양에 미군 비행기가 처음 폭격한 날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는데 인천상륙작전이 있은 후 국군이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지하활동을 위해 평양을 빠져나왔는데 그때 어머니가 여비로 쓰라며 순금을 구두 굽 안에 넣어주었다고 했다. 얼마후 국군과 함께 평양에 입성한 그는 촬영소를 접수하였는데, 촬영소 안의 기가재들을 국군이 노획해 남한으로 가지고 내려갔고 그 직후 미군의 폭격으로 촬영소는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1950년대 한국영화는 평양의 국립영화촬영소의 기자재로 만들어졌다고 했다. 


안현철 감독은 국립영화촬영소에서 1년 정도밖에 근무하지 않았고 6.25 발발 직후에 남한으로 내려와서 자세한 사항은 모른다면서 자기 외에도 국립영화촬영소에 근무했던 분이 두 명 더 계시는데 그중에 최성학 촬영감독이 양평에 거주하고 있다며 이 분들이 월남하게 된 경위도 들려주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원산 앞바다에서 기록영화 촬영을 한다고 배를 타고 나간 이들은 남한에 고위 경찰을 가족으로 둔 한 분이 월남을 시도하면서 남한에 어떠한 연고도 없던 최성학 선생까지 얼떨결에 남한으로 왔다고 했다. 이 둘은 미군의 조사를 받은 후 헌병대에 넘겨져서 죽도록 두들겨 맞고 새로운 호적을 받아서 사회로 나왔다고 한다. 이중 키가 큰 한명은 자기 나이보다 10살정도 많게, 키가 작았던 최성학 선생은 자기 나이보다 10살 정도 어린 호적을 받았는데 그렇게 안하면 바로 군대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고. 나중에 최성학 선생님께 통화를 해 인터뷰를 요청드렸으나 거부하셔서 만나 뵙지는 못했다. 아쉬울 따름이다. 안현철 감독은 2020년 향년 91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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