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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복키노와 <지하촌>

카프영화의 지도자 윤기정 10.

by 한상언

일본에 파견되었던 임화가 이북만의 여동생 이귀례와 함께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뿐 아니라 일본에서 영화 공부를 하던 김남천도 임화와 동행해 왔다. 윤기정은 일본에서 돌아온 이들을 반갑게 맞이하며 서울키노를 대신할 카프의 새로운 영화제작 조직 구성에 착수했다.


영화제작 조직의 이름은 노동자들을 상징하는 블루칼라, 청복키노였다. 청복키노는 1930년 11월 조선총독부 맞은편인 적선동 50번지에 문을 열었다. 적선동 버스 정류장 앞 벽돌로 지은 2층 집들이 늘어선 곳에 있던 이곳은 청복키노라는 작은 간판이 붙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회벽에 할리우드영화와 독일영화 속 유명 배우들의 프로필 사진이 붙어 있는 사무실이 나왔다. 한쪽 끝에 붙은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면 배우들의 연습실이 있었다. 청복키노에는 감독을 맡기로 한 강호와 박완식을 비롯해 일본에서 돌아온 임화, 김남천, 이귀례 그 외 신응식(신석초), 민우양, 정하보 등 카프의 청년 일꾼들이 함께했다.


다행히도 출자자를 구한 이들은 영화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창립작은 빈민굴을 배경으로 했다. 윤기정, 강호, 신응식이 적선동 2층 연습실에서 머리를 맞대고 시나리오를 작성했다. 대략의 줄거리를 작성 후 세부 사항들을 논의했다. 간혹 의견 차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곧 합의에 이르렀다. 논쟁의 대부분은 어떻게 해야 검열의 가위를 교묘하게 면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지척에 있던 내수동 윤기정의 집에서 식사를 날라다 먹으며 열흘간 합숙하며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완성된 시나리오는 박완식이 나흘 만에 각색하였다.


완성된 시나리오는 다다미 밑에 감춰두었다. 10월 혁명 기념일을 하루 앞둔 11월 6일, 경기도 경찰부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좌익 활동가들에 대한 예비검속이었다. 일렬종대로 묶여 유치장으로 끌려갔다. 다행히 다다미 밑에 감춰둔 시나리오는 뺏기지 않았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10월 혁명기념일인 11월 7일 아침이 되자 어느 감방에서부터 적기가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적기가가 울려 나오자 모두들 합창을 시작했다. 간수들은 찬물을 떠서 감방에 퍼부었다. 노래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감방에서의 경험으로 인해 영화의 내용은 더욱 전투적으로 되었다. 이렇게 완성된 시나리오는 신응식(申應植, 申石艸) 원작, 박완식(朴完植) 각색으로 발표되었으나 실제로는 제작을 맡은 윤기정과 연출 강호가 합심해 만든 일종의 집체작이었다.


해를 넘긴 1931년 1월부터 촬영이 시작되었다. 영화의 제목도 <늘어가는 무리>에서 <지하촌>으로 바뀌었다. 촬영환경은 실로 열악했다. 이들이 가진 기자재라고는 은지를 바른 레프 몇 장뿐이었다. 돈을 마련해 4,000미터의 네가필름을 구입하고 낡은 카메라도 하나 임대했다. 그 외 진행비는 한 푼도 없었다. 배우들은 분장을 한 채 수건을 뒤집어쓰고 촬영지까지 걸어 다녔다. 촬영 중 점심은 물론이거니와 아침, 저녁조차 변변히 먹지 못했다. 이러한 모습을 수상히 여겨 촬영 도중 두 번이나 형사들에게 검거되기도 했다. 힘겹게 제작되던 영화는 3월에 마무리되었다.


영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한 겨울 시구문 밖 빈민굴 날품팔이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 유일한 철공소 노동자 김철근이 주인공이다. 그의 누이와 빈민굴의 소매치기 청년 허재민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다. 어느 날 이곳에 인테리 청년 민효식이 들어와 사회실정조사회라는 간판을 걸고 구제회를 조직한다. 또 다른 구원의 손길은 종교단체 구세군이다. 일제가 군비를 확장하며 호황이 되자 철공소 주인은 빈민굴을 헐고 공장을 확장할 계획을 세운다. 이를 위해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하기로 한다. 임금 삭감에 저항하여 노동자들의 시위가 시작되자 공장주는 파업을 분쇄하기 위해 빈민들을 노동자로 고용한다. 이러한 자본가의 의도를 빈민굴에 살고 있는 파업노동자 김철근이 알아채고 인테리 청년 민효식과 막노동꾼인 동생 김성근, 소매치기인 허재민에게 알린다. 사태가 악화되자 민효식은 이들 파업노동자들을 버리고 도망친다. 그러나 빈민굴에 대한 철거가 진행되자 촌민들은 격분하고 포기하지 않은 김성근과 허재민의 노력으로 막노동꾼들까지 파업노동자와 연대한다. 결국 파업을 주도한 인물들은 체포되어 감옥에 가고 이들이 감옥에서 나왔을 때 촌민들은 자유노동자조합과 차가인동맹 간판이 달린 회관으로 이들을 안내한다.


촬영이 시작되면서 청복키노의 구성원이 종로서에 검거되고 아무런 구금 이유를 찾지 못하자 2주 만에 전원 석방되는 식의 탄압이 있었다. 일제는 출자주를 협박하여 촬영이 마무리된 후 더 이상의 자금 지원을 포기하도록 했다. 두 번째 출자주는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개작을 요구했다. 또한 작품을 상영할 권리 일체를 자신이 가지겠다며 억지를 썼다. 결국 청복키노에서는 제2출자주의 요구를 거절하고 새로운 출자주가 나설 때까지 제작을 잠정적으로 중단하기로 한다.


1931년 4월 초 발간된 『단성사 주보』 102호에는 완성되지 못한 <지하촌>의 흔적이 남아 있다. “不日封切 <지하촌>” “문제의 조선영화” 감독 강호, 각색 박완식, 촬영 민우양, 주연 이규설, 이정애, 임화, 강춘희, 이학래 등이 표기되어 있다. 이 영화는 완성을 거의 앞둔 상태에서 이렇게 멈춰 버렸다. <지하촌>의 제작이 중지되자 서울키노의 김유영은 출자주와 만나 이 작품을 자신들이 이어받아 만들어 보겠다는 의사를 전한다. 이러한 소식을 전해 들은 윤기정과 강호 등 청복키노 측에서 크게 반발하며 없던 일이 되었으나 두 진영 간의 갈등은 극에 달하게 된다.


포문은 임화가 열었다. 그는 『조선일보』에 실은 「서울키노 영화 『화륜』에 대한 비판」에서 서울키노에서 만든 <화륜>이 얼마나 반동적인 영화인지를 신랄하게 지적했다. 특히 계급 간의 갈등을 주인공들 사이의 치정문제로 치환하였을 뿐만 아니라 “카프를 배반한 탈주자”이자 사회적 인식이 불철저한 구성원들에 의해 만들어졌기에 애초부터 반동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영화라고 주장했다. 임화의 <화륜>에 대한 공격에 대해 서광제가 모든 책임을 김유영에게 돌리는 식의 변명을 늘어 놓자 김유영이 분개하면서 서울키노는 와해되었다.


윤기정은 1931년 4월 신간회 해소를 위한 위원회에 박영희를 대신하여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6월 중순에는 서울 시내의 조선인 남녀 중등학교에 반전데이의 투쟁을 알리는 선전 삐라가 살포된 것을 계기로 임화와 함께 종로서 고등계에 체포되었다가 증거불충분으로 이틀 동안 조사를 받고 나왔다. 종로서에서는 신간회 해소에 앞장서고 있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움직임을 예의 주목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핵심 성원들을 또다시 체포하기 시작했다. 8월에는 청복극장을 이끌던 안막과 청복키노의 대표 윤기정 그리고 카프의 중심인물인 박영희, 임화 등이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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