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영화의 지도자 윤기정 13.(완)
1945년 8월 15일 일제는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했다. 조선은 해방되었고 미래를 준비하던 사람들은 민족국가 수립을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문학인 중에서는 임화, 김남천, 이태준 등이 주도하여 문학예술인을 망라한 조직체인 문화건설중앙협회의회를 구성하였다.
문인보국회가 주도하던 일제말기의 문학장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던 윤기정은 해방 후의 상황을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었다. 이 판을 움직이는 임화와 김남천은 카프 시절부터 윤기정을 큰형처럼 따르던 인물이었지만 일제 말기 조선 문학인들의 통절한 반성의 시간 없이 침략전쟁에 동조하는 글을 쓴 인물들이나 순수예술을 주창하던 이들이 해방 후 조선의 문화예술계를 주도한다는 것이 마뜩잖았다.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이 멈춘 자리로 돌아가 다시 출발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윤기정은 38선 이북 지역에서 생활하고 있는 작가들을 포함하여 과거 카프 출신의 작가, 예술가들과 연락하여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을 재건하기로 한다. 그의 발 빠른 움직임 덕에 해방 후 한 달만인 1945년 9월 17일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을 재건한다. 강령은 프롤레타리아 문학 건설을 기함, 부르주아문학, 사회개량주의문학, 파시즘문학등 일체 반동문학을 배격함, 국제프롤레타리아문학운동의 촉진을 기함으로 정했다. 위원장은 이기영이었으며 윤기정은 서기장으로 실질적으로 조직을 책임졌다. 곧이어 문학예술가들을 망라한 상위 조직인 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이 만들어진다. 의장은 한설야, 서기장은 윤기정이었다.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의 위원장인 이기영이나 그 상위 조직인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의장인 한설야 모두 38선 이북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기에 실질적으로 조직을 책임진 것은 윤기정이었다. 그는 11월 7일 러시아혁명 기념행사를 기획했으며 이 행사에서 조선문학운동개관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윤기정은 문학인들 각자의 다양한 입장과 태도를 조율하여 조직을 힘 있게 꾸려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작품을 창작하는 것보다는 조직을 이끄는 데 있어서 자신의 노력을 쏟았다. 그에게 문학이나 영화는 개인의 양명이나 돈벌이 수단이 아닌 사회주의 건설의 하나의 도구였다. 이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것은 별문제가 아니었다.
연안에서 돌아온 김태준이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으로 나뉜 문학예술조직을 하나로 합치자는 제안을 해 왔다.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이 통일노선을 선택한 것이다. 윤기정은 통일된 민족국가수립을 위해서는 서로의 차이를 강조하는 것이 아닌 공통점을 찾아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1945년 12월 11일, 문건 측에서 이태준, 이원조, 임화, 김기림, 김남천, 안회남이, 프로문학동맹에서는 윤기정, 권환, 한효, 박세영, 송완순이 합동위원으로 협상에 나섰다. 두 단체 산하 기구를 통합하기 위한 촉성위원과 새롭게 문학가동맹을 조직하기 위한 전형위원이 선정되었다. 이기영, 한설야 등 38 이북 지역의 문학인들이 많이 포진된 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측에서 많은 부분을 양보했다.
조선문학동맹의 중심에서 배제된 윤기정을 비롯한 프로예맹 측 문인들은 1935년 카프 해산 이후 문을 닫은 별나라사를 자유출판사라는 이름으로 부활시키기로 하고 출판활동을 전개하기로 한다. 편집동인으로는 윤기정을 비롯해 한효, 권환, 송영, 엄흥섭, 박아지, 홍구, 신고송, 강호, 안준식, 박세영이 이름을 올렸다.
자유출판사는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이들은 북한으로 눈을 돌렸다.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공식 출범한 이후 38선 이북지역에서는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6년 들어 이기영과 한설야 등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 이름을 올린 문학인들이 전면에 서서 북조선예술총연맹을 조직하여 북한 문화 부문을 지도했다.
1946년 4월 윤기정은 평양행을 선택한다. 서울역에서 가족들의 환송을 받으며 개성행 기차에 올랐다. 개성에서 북행에 동참한 동지들과 함께 높은 산과 험한 령을 넘고 창자 같은 시내를 건넜다. 야음을 틈타 다시 걷기 시작한 이들은 으슥한 골짜기를 지나 38선을 넘었다. 아우라지 강변에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넌 후 준비된 교통편으로 평양으로 갔다.
평양에서 윤기정은 이기영이 위원장으로 있는 조쏘문화협회의 서기장 직을 맡았다. 또한 1946년 10월에 조직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의 중앙위원이자 북조선영화위원회 중앙위원을 맡았다.
평양으로 떠난 후 소식이 없자 큰 아들 정진이 평양으로 왔다. 윤기정은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온 아들을 북조선영화촬영소에 넣어 영화를 배우도록 했다. 전쟁 직전 가족들이 걱정된 윤기정은 큰아들을 서울로 내려보냈다. 그러나 38선에서 체포되었고 이것이 큰 문제가 되자 인민군에 자원 입대시키는 것으로 무마했다.
전쟁이 터졌고 인민군이 점령한 서울에 윤기정이 나타났다. 전선 시찰을 떠나는 중 가족을 만나러 집에 들른 것이다. 이것이 윤기정이 가족과 만난 마지막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몸이 좋지 않던 윤기정은 공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 그는 1955년 끝내 사망하고 만다. 불과 50세를 조금 넘긴 나이였다.
서울에는 그의 부인을 비롯해 큰딸 윤영옥(1933 생), 둘째 아들 윤화진(1936 생), 셋째 딸 윤영숙, 넷째 딸 윤정자, 다섯째 딸 윤화자가 남았다. 평양의 큰아들 윤정진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서울에 남은 가족들은 연좌제의 고통 속에서 힘든 시간을 버텼다. 그렇게 이산의 시간은 80년이 흘렀고 그의 자식들은 이미 8-90대의 고령으로 아버지에 대한 희미한 기억만을 가지고 있다. 이제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보다는 그 신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차남 윤화진은 아버지의 헌신을 기리기 위해 현재 효봉윤기정문학상을 제정하여 매년 관련 활동에 이바지한 인물을 선정하여 수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