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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쉼표구름 Apr 30. 2024

어른이 되면 사람과의 관계가 쿨해질 줄 알았다.

   

같은 기관에 다녔던 아이 셋이 하원 후에 놀이터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했던 것이 시작이었다. 유치원이 끝나는 시간에 아이를 데리러 가면 누구랑 누구랑 놀이터에서 만나서 놀기로 했다는 말을 했는데 그 아이 엄마 연락처를 모르기 때문에 만나지 못한다고 설득하여 집에 들어가곤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원 시간이 겹쳐 세명의 엄마와 세명의 아이가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이때다 싶었는지 아이들이 함께 놀자고 성화를 부렸다. 그렇게 한 두 번 같은 놀이터에서 놀면서 나눈 대화들이 쌓이다 보니 아이들이 유치원에 간 사이 엄마 셋이서 따로 만나게 되었다.



그중 나와 언니는 알게 된 지 꽤 오래된 사이다. 아이들끼리도 잘 놀았지만 엄마들끼리 마음이 잘 맞았다. 식성도 비슷해서 번갈아가며 서로의 집에서 만나 점심을 만들어 같이 먹기도 했고 여행을 다녀오면 서로의 선물을 챙겨 왔다. 특히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 치부를 들키는 것만 같아서 하지 못하는 말까지도 언니에게는 털어놓을 수 있었다.




학창 시절에는 더 친해지려면 내 비밀을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빨강머리 앤과 다이에나처럼.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내가 말한 비밀은 나의 약점이 되어 돌아왔고, 때론 놀림감이 되기도 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른들은 약점을 직접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서서히 거리를 두는 것으로 티를 냈다. 너와 나는 급이 다르다는 듯이 그랬다.



그런 일을 몇 번 겪은 다음부터는 해도 되는 얘기와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를 구분지어야 한다는 걸 배웠다. 그런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니 관계를 맺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항상 벽 하나를 둔 것처럼 사람을 대했기 때문에 뜻하지 않은 오해도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관계에서 나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버리면 나의 비밀도 털어놓고 위로받고 싶어질 것 같았다. 그랬다가는 또다시 상처받게 될지도 몰랐다. 그런데 언니는 달랐다. 언니에게는 가로막힌 벽이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비밀만 없을 뿐 아니라 스케줄 하나하나 일거수일투족 모르는 일이 없을 정도였다. 다른 한 명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언니 생일을 맞아 아이들이 없는 낮에 엄마 셋이 모였다. 함께 점심을 먹으려고 식당에 들어갔다. 평소라면 내 옆에 앉았을 언니가 반대편에 앉았다. 괜한 예민함을 들추는 것 같아서 속으로 '이런 날도 있는 거지' 하고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나란히 앉으면 행동도 함께 하게 되는 것인지 셀프바에 다녀오는 것도 둘이서만 짝을 지어 다녀왔다. 또 한 번 '그게 뭐 대수라고.' 음식과 함께 꼭꼭 씹어 삼켰다. 우리는 여느 때처럼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마주 보고 앉은 나보다는 나란히 앉은 둘의 대화가 더 자주 이어졌다.



둘이 나누는 대화 내용이 나는 전혀 모르는 주제로  흘렀다. 추측해 보건대 나 없이 둘이 만났고 거기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한 것이었다. ‘둘이 따로 만난다는 말도 없었는데...’ 그런 생각에 미치자, 예민함이고 뭐고 속상함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속상하기도 하고, 왠지 자존심도 상해서  "무슨 얘기야?"하고 물을 수가 없었다. 만나지 못하더라도 전화와 톡으로 시시콜콜 대화를 나누곤 했는데 내가 모르는 일이 있었다니. 그날 결국 급체하고 말았다.



나 빼고 나머지 두 엄마의 아이 성별은 같다. '딸'이다. 딸들은 클수록 여자 친구들끼리만 놀고 싶어 했다. 집에서 만나 같이 놀 때면 "이 방은 여자만 들어올 수 있어!" 하며 아들인 우리 아이를 밀어내는 걸 직접 보기도 했다. 그런 일을 떠올리자 둘이서만 놀고 싶다고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두 번은 안된다고 하다가 딸들의 성화에 못 이겨 따로 만나 놀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끝내 묻지 못했기에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언니를 향한 서운한 마음은 오래도록 가시지 않았다.



아이들끼리 너무 놀고 싶어 해서 둘이서 놀았다고 나에게 말해주면 안 되는 걸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과거의 아픔을 말하며 부둥켜안고 울었던 우리였는데 왜 그런 사소한 말은 어려웠던 것일까? 나에게 숨기려고 했던 거라면 끝까지 내 앞에서는 내색하지 말았어야지. 왜 셋이 있는 자리에서 둘이서만 아는 이야기로 내 마음을 흔들어 놓을까? 혹시 나를 밀어내고 둘이서만 지내고 싶은 것은 아닐까?



속상했던 마음이 점점 더 유치한 상상에 이르자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어린 시절 놀림감이 되어 엉엉 울던 9살짜리 꼬맹이가 되어 버리겠다 싶어서다. 두 엄마가 둘만 만나 놀기를 선택했다 하더라도 그 선택의 영역은 내 영역이 아니다. 나에게 일일이 물어볼 필요도 없다. 하지만 서운한 감정을 느끼는 나 자신까지 탓하지 않기로 한다. 나는 나대로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셋이 있는 자리에서 하나는 전혀 모르는 이야기를 둘이서만 소곤대는 것은 실례이며 기분이 나쁠 수도 있다는 걸 고려했어야 하는 것인데 그러지 못한 그들에게 괘씸한 마음이 드는 것도 과한 감정은 아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서로에게 지켜야 할 선이 있고 배려의 영역이 존재한다.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더 예의를 갖추고 조심해야 한다. ‘지내온 시간이 있는데 이 정도는 말하지 않아도 이해해 주겠지’ 이런 마음은 대단한 착각이다. 오래 알았다고 하여 상대방의 마음과 생각을 꿰뚫을 수 있다면 세상에는 어떤 분쟁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그렇지 않다. 다양한 언어와 감정들이 오가며 그것이 삶을 지탱해주기도 하고, 때론 좌절의 늪에 빠지게 만들기도 한다.



어른이 되면 사람과의 관계가 한결 수월해질 줄 알았다. 조금 덜 배려해 주어도 밖으로 표현을 덜 하더라도 쿨 하게 넘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어른이 되어도 섭섭할 수 있고, 그런 감정은 충분히 인정받아야 한다.



그렇지만 어른이기에 좀 더 나은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원하는 말이나 행동을 기대하기보단 나 자신을 돌보는 시간을 늘려야겠다고 다짐한다. 나 자신과의 관계부터 쿨해지는 연습을 해야겠다. 언젠가 진짜 관계에 쿨해지는 날이 오지 않더라도 조금 덜 앓고 지나갈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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