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남편이 싱가포르에 서류정리를 할 일이 생겨 4박 5일간 발리를 떠나 싱가포르에 가있는 동안 나와 아이 단둘이 발리 집을 지켰다. 아이가 태어난 이후 나는 두 번 정도 남편을 싱가포르에 두고 아이와 한국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한 번은 3주 가까이, 또 다른 한 번은 일주일 정도. 흔히들 아내와 아이가 친정으로 떠나면 혼자 남은 남편은 모처럼의 자유를 만끽하기에 여념이 없다고들하던데 아마 우리 남편도 그랬으리라. 그러나 반대로 남편이 떠나고 아이와 내가 둘이 집에 남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만약 싱가포르였다면 내가 혼자 걸어다니며 장도 볼 수 있고 가깝진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멀지도 않은 곳에 시누이도 살고 있고, 무엇보다 치안이 좋은 나라였기 때문에 전혀 걱정스럽지 않았지만 발리는 조금 달랐다.
일단 우리 집은 노후된 주택이고 인도네시아 특성상 선불 전기 토큰(일정 금액씩 선불로 지불하여 전기를 사용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주방불은 가스통에 연결해서 사용하고, 물도 갤런이 떨어질 때마다 배달시켜야해, 툭하면 두꺼비집이 내려가 전기가 나가... 별안간 집 어디에서인가 무엇이 고장날지 모르기 때문에 이 모든걸 해결해오던 남편이 없다는건 나에게 꽤나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남편이 매일 오토바이로 아이 등하원을 담당했었으니 당장 아이 등하원도 내가 오토바이 택시나 일반 택시로 오가야할 상황이었다.
매일같이 오토바이로 드나들던 슈퍼도 택시를 불러야 갈 수 있기에 우리는 남편 출국 전 대대적으로 장을 봐서 냉장고를 채워놓았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마쳐갈 쯤 남편의 출국 전날 새벽 발리에는 꽤나 큰 지진이 났다. 침대의 흔들림을 느끼고 눈을 떠보니 새벽 4시. 진동은 생각보다 오래갔지만 결국 잦아들었기에 우리는 다시 잠을 청했다. 지진까지 난 상황에서 남편없이 4박 5일이라니. 싱가포르에 살 때부터 자영업을 했던 남편은 항상 시간이 자유로웠다. 그래서 육아의 많은 부분을 함께했고 살림의 반도 자연스레 남편의 몫이었다. 더구나 발리에 와서는 내가 오토바이를 다루지 못하고 언어도 자유롭지 않아 전반적으로 남편에게 더 많이 의지하던 차였다.
저녁 비행기를 타러 떠나는 남편을 집 앞에서 배웅하며 딸아이는 목놓아 울었다. 고작 네 밤만 자면 되는데 아빠 빨리 오라며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이를 달랜 후 저녁을 먹이고 침대에서 책을 읽어주는데 나도 모르게 집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훨씬 더 예민해진 나를 발견했다. 지나가는 오토바이 소리에도 귀가 쫑긋서고 창문 밖 어디선가 불빛이 지나가는 것에도 신경이 곤두섰다.
8시 등원에 맞춰 아이 아침을 준비하며 동시에 다리 밑을 계속 맴돌며 우는 고양이 밥까지 준비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보통은 남편이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있으면 내가 아이 머리를 빗겨 주고 옷을 갈아입히고 아침을 먹는데 처음으로 두 사람 몫을 혼자하려니 허둥지둥의 연속이었다. 결국 8시 5분에 오토바이 택시로 아이를 겨우 등원시키고 집에 돌아와 집 청소에 빨래를 돌리고 아이 점심을 준비하다보니 하원시간. 하원 후 바삐 점심을 준비하는데 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며 유치원에서 있었던 이야기 보따리를 푸는 따님. "엄마 이건 뭐야? 국물에 뭘 넣는건데? 이 새우는 죽은거야 산거야?" 요리에 대한 질문부터 "오늘은 XX가 말을 잘 안들어서 선생님이 구석에 가서 서있으라고 했는데...쉬는 시간에는..." 유치원 친구들과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들어주다보니 절로 남편이 그리웠다. 보통은 한 명이 식사 준비를 하면 다른 한 명은 아이를 전담하는데 배고픈 상태에서 이 둘을 같이 하려니 정말이지 난이도 최상이었다. 새삼 직장 다니는 엄마들은 어떻게 아이를 키우는지, 남편이 바빠 많이 도와주지 못하는 전업 엄마들은 또 어떻게 아이를 키우는지 존경스러울 따름이었다.
다행히도 하루, 이틀이 지나고 아이는 엄마의 원맨쇼가 보기 안쓰러웠는지 엄마의 불호령에 즉각즉각 밥상에 앉아 스스로 밥을 먹으며 말을 잘 들어주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아이가 유치원에 간 동안 조용한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되었다는 것이었다. 무엇인가를 해야하는 남편과 함께 있으면 항상 영상을 보거나 요리를 하거나 장을 보러가고 운동을 해야했었는데 나 혼자서는 소파에 앉아 멍을 때리기도 하고 글을 쓰며 시간을 보내도 시간이 한참이나 남았다. 혼자 아이 보며 발리에 있는 것도 할만하네 느껴질 때 쯤 아이를 하원시켜 집에 돌아와보니 집에 불이 나가있었다. 옆집 아주머니 말씀으로는 불이 나간지 한 시간정도 되었다고 했는데 물이 전기 펌프로 돌아가는 우리 집은 전기와 더불어 물도 못 쓰게 되었다. 겨우겨우 가스 스토브로 아이 점심을 데워먹이고 설거지도 하지 못한 채 선풍기도 없이 아이와 땀을 뻘뻘 흘리며 놀아주어야 했다. 혹시 모르니 핸드폰 배터리를 아껴야한다는 생각에 으레 친정엄마나 시어머니에게 걸던 영상통화도 걸지 못하고 전기가 제 때 안 들어오면 나는 오늘 아이와 이 집에서 잘 수 있으려나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세 시간이 흘렀고 마침내 늦은 오후무렵 전기는 다시 들어왔다.
옛날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외할머니댁 관리비 고지서를 매 달 관리하시던 엄마가 생각났다. 할아버지께서 평생 은행일이나 관리비 수납을 관리하셔서 할머니는 아무 것도 모르신다고. 어렸을 땐 그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지 못했는데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결혼하고 살면서 남편이 집에서 담당하는 역할과 구역, 내가 담당하는 역할과 구역은 점점 명확해졌다. 그렇게 5년이 지나니 남편이 담당하는 에어컨 청소나 화분관리에 대해 나는 아무 것도 모르게 되었고, 남편은 아직도 아이의 각종 상비약이 어디있는지, 빨래할 때 세제는 어떤 걸 쓰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분명 한 사람의 역할을 온전히 하던 두 사람이 만났는데 결국 남은 건 반쪽뿐인 두 사람이 합쳐져 한 사람의 역할을 겨우 하며 사는 느낌이랄까. 남편의 빈자리는 커도 슬프고, 작아도 슬프다. (그러나 그와중에 남편은 4박 5일 싱가포르에서 신나게 모처럼 시골 발리에서 벗어나 도시의 자본주의를 즐기며 쇼핑과 먹거리에 흠뻑 빠져있다 돌아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