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의 계절이 돌아온다
작년 연말 발리의 무지막지한 우기를 집 찾기에 온전히 바쳤던 우리. 결국은 한 달 넘는 방황 끝에 울며 겨자먹기로 지금 사는 집에 정착해 산지 어언 10개월이 지났다. 침실 3개, 화장실 3개에 2층 주택. 비교적 깔끔한 상태와 좋은 위치, 아이의 유치원과도 가까운 거리. 무엇보다 집주인과 바로 만나 집문서를 확인하고 계약서를 쓸 수 있다는 장점(한국같으면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여기에서는 집문서에 집주인으로 등록되어있는 사람과 만나 그들의 신분증을 확인하고 계약하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에 가까운 것 같다)에 우리는 비싼 연세를 내고도 자발적인
호구가 되어 지금 집으로 이사하기로 결심했었다 - 집 계약날 계약서에 싸인하러 온 집주인 할아버지 할머니 부부의 입이 귀에 걸린 얼굴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렇게 고생 끝에 구한 집이었지만 살다보니 많은 문제가 있었다. 매일같이 화장실 하수구에서 올라오는 하수구 냄새, 특히 안방 화장실 냄새는 아무리 매일같이 청소를 해도 없어지지 않았고 급기야 잠이 들기 전 코에 향초를 대고 있다가 잠을 청해야할 정도가 되었다. 거친 수질로 인해 우리가 이사오기 전부터 이미 다 망가져버렸던 화장실 타일과 코팅이 벗겨진 세면대는 너무 낡아 손님을 초대할 때면 나로 하여금 “아무리 청소해도 이게 최선이네요…”라는 말을 혼잣말처럼 내뱉게 만들었다. 아랫층 침실은 구조상 직접 햇볕을 받지 못해 항상 습기가 차있었고 그 방에 보관하던 모든 철제 연장을 1년도 안되어 다 녹슬게 만들었다. 이 모든 단점을 가진 이 집에 지금과 같은 혹은 더 비싼 연세를 내며 계약을 연장할 순 없다는 생각에 우리는 결국 다시 이사할 집을 찾기 시작했다.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난 후 땡볕 밑에서 주변 골목을 샅샅이 오토바이를 타고 오가며 임대 표시가 붙어있는 집을 찾기 시작했고 하루의 시작과 끝을 부동산 어플을 뒤지며 보내고 있다. 타국에서 혹은 한국에서도 이사할 집을 찾는 것은 여러 운이 함께 해주어야한다는걸 잘 안다. 이사 시기와 이사하고자 하는 동네, 아이가 있다면 집과 학교와의 거리, 치안상태 등등이 있지만 발리에서 특히 거주용 집을 찾기 어렵게 만드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면
1. 계약기간에 따라 선불로 세를 지불해야한다.
매주 혹은 매달 단위로 렌트하는 관광객용 풀빌라가 아니라면 보통 이 곳의 집은 연 단위로 세를 지불하게 된다. 월세가 50만원인 집이라도 1년을 계약하게 되면 600만원을 계약서 쓰는 날 한번에 지불해야하는 셈. 물론 주인과 조정하여 세세하게 계약조건을 조정해 연세 지불을 몇 번에 걸쳐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집주인은 1년치, 혹은 2년치, 장기 렌트라면 10년치의 렌트비를 한꺼번에 받기도 한다. 이 때문에 세입자는 그 집이 어떤 상태인지 살아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모든 세를 다 지불해야 하는 위험부담을 떠안는다. 한번에 목돈을 지출해야하는 부담과 더불어 집의 상태가 어떤지 모르는 상태에서 입주해 무조건 계약기간을 채워야한다는 것. 1년이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2년이나 5년, 10년이라면 상당한 목돈의 지출과 위험을 부담해야한다.
2. 토지, 집 소유 및 임대 관계가 매우 복잡하다.
인도네시아는 법적으로 외국인이 땅이나 주택을 소유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이 곳에 장기로 거주하고자 하는 외국인은 법인을 세워 법인 이름으로 땅 혹은 주택을 소유하거나 장기로 땅을 임대해 주택을 짓는 방법 등으로 거주하곤 한다. 복잡하고 기간이 걸리는 과정이기에 많은 외국인들은 주택을 연단위 혹은 장기로 임대해 살기도 한다.
남편이 인도네시아인이지만 당장 땅을 사거나 주택을 매입할 예정이 없던 우리는 1년 혹은 2년 단위로 임대해 살아보면서 차차 발리 지역을 익혀보자는 심산이었는데 마음에 드는 집을 모처럼 가뭄에 콩나듯 발견하면 으레 토지나 주택 소유관계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엎어지기 일쑤였다.
일례로 작년 처음 마음에 들었던 주택은 땅은 발리인의 소유였지만 다른 발리인+러시아인 부부가 땅을 장기 임대하여 집을 지은 케이스. 여기서 문제는 주택을 지은 발리인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외국인인 아내는 주택을 소유할 수 없기에 주택의 소유가 발리인 남편의 어머니에게로 넘어갔다는 것이었다. 실소유주는 러시아인 아내이지만 계약서상 주택 소유주는 시어머니라는 것. 우린 너무 복잡해지는 소유 및 임대관계에 계약서 초본까지 받았다가 결국 그 집을 포기했다. 발리 이주 전부터 발리 부동산 사기는 악명이 높았기에 우린 지레 겁을 먹었던 것이다.
맘에 드는 집을 겨우 찾은 지금 우리는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겼다. 집은 너무 마음에 들지만 집주인(이라고 이야기하는) 발리 여자는 우리가 본인 이름의 집문서를 보여달라고 하자 설명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사정인즉슨 그녀는 우리가 맘에 들어하는 집 바로 이웃집에 거주하고 있으며 본인집과 이 집 모두를 전 집주인으로부터 매매했지만 소유 명의 변경이 아직 진행중인지라 실질적으로 그녀의 이름이 찍힌 집 소유문서를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임대 계약을 하게 된다면 우린 실질적으로 소유권이 넘어가는 중인 주택을 임대하는 것이라 계약을 전 소유주인 사람과 하는 것인지 우리에게 집을 보여준 이 발리여성과 해야하는건지 확실하지 않게 되는 것. 그녀가 본인 아이들과 바로 옆집에 산다는 사실과 이런 일이 발리에서는 꽤 흔하게 벌어지는걸 알게된 지금 이 여성에게 소유권이 넘어가는 과정에 있다는 공증서의 서류 한 장을 믿고 우리는 이 계약을 진행하는 편으로 마음을 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만약 이 소유권 전환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혹은 이 모든게 공증사무소와 이 여자의 사기행각이라면?
3. 무능한 부동산 에이전트들
이 곳은 어떨 때 보면 부동산 무법지대 같은 느낌이 든다. 특히 부동산 에이전트들을 보면 그렇다. 부동산 중개사무소가 있긴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인의 집을 대신 부동산 사이트나 페이스북 마켓플레이스에 올려주는 부동산 분야의 전문성은 없는 개인이 많다. 누군가 한 명이 전담해서 그 매물을 담당하는게 아니기도 하고 집기가 다 갖춰져있는 매물이 많다보니 자연스레 에이전트들이 집 열쇠를 상시로 가지고 있는게 아니라 우리가 에이전트에게 연락을 하더라도 그들이 집주인과 연락을 주고받은 후에야 열쇠를 받아 집을 구경할 수 있다.
인터넷에 떠도는 매물이나 건너건너 아는 사람들의 매물을 자기가 다시 리스팅하는 경우가 다반사라 우리가 집을 보기 위해 가보면 막상 에이전트 자체도 그 매물을 본 적이 없는 경우가 아주 많다. 심지어 에이전트가 길을 잃어 우리보다 늦게 도착한 적도 있었다. 에이전트에 따라 같은 매물인데도 본인이 받고픈 수수료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가격이 천차만별이기도 하다. 특히 요즘과 같이 집을 구하는 세입자는 넘쳐나고 매물은 많지 않은 시기에는 한몫해먹으려는 전문성없는 뜨쟁이 에이전트들이 너무 많아 혼란스러울 따름. 마음에 드는 매물을 찾아 연락해도 그 매물이 나갔는지 아닌지조차 체크도 안하는 에이전트들, 그럴듯한 매물을 올려놓고 이미 나갔으니 다른걸 보여주겠다며 사진 폭탄을 보내는 에이전트들과 메세지를 주고받다보면 막상 집을 보러가기도 전에 이미 지칠 때가 많다.
4. 마음에 들기 쉽지 않은 로컬 집 구조
실은 위에 언급한 점들은 이 곳의 구조적인 문제이기에 아무래도 좋다. 가장 어려운 것은 결국 나의 눈높이와 지갑사정은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발리에는 외국인들이 거주하는 크게 두 가지 종류의 주택이 있는데 하나는 빌라라고 불리는 휴양지스러운 주택, 그리고 일반 로컬 주거용 주택이다.
빌라는 수영장이 딸려있거나 정원이 있는 경우가 많고 서양인들이 주로 선호하다보니 서양식 주방구조, 자연광이 많이 들어오는 실내, 비교적 깔끔하고 넓은 화장실 등을 갖추고 있다. 일반 로컬 주거용 주택은 집밥을 잘 먹지 않는 발리 특성상 주방이 매우 협소하고 절도를 염려해 창문이 많지 않아 실내가 굉장히 어둡고 통풍이 되지 않는다. 습한 기후에 거울이 쉽게 망가지기 때문에 새 집에도 화장실에 거울이 달려있는 집이 거의 없다. 대가족이 함께 사는 경우도 많아 침실은 많은데 각각의 침실은 어둡고 매우 작다.
우리의 취향은 정확히 둘의 중간. 로컬주택의 형태이지만 채광과 통풍이 잘되어야하고 집밥을 많이 해먹는 우리 가족 특성상 주방이 커야한다. 그렇다고 빌라를 고르자니 관리도 어렵고 우리의 예산상 한계에 부딪힌다.
발리에서 오래 거주하신 한국분들이 말씀하시길 이 곳 집은 70%만 마음에 들어도 그 집으로 이사해야한다고 하셨다. 신축 주택이라도 열대기후와 건축에 사용된 저품질의 자재들로 인해 하루가 다르게 노후되기 십상인 이 곳 특성상 그리고 한국과 싱가폴의 편리한 아파트에서만 살아오던 내 경험상 마음에 꼭 맞는 곳을 찾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우리나라와 같이 전문 포장이사가 흔한 곳이 아닌지라 집을 한 번 옮기면 큰 가전제품이나 가구들이 많이 손상되기도 한다. 결국 답은 내 맘에 맞는 내 집을 지어 이사 걱정없이 사는 것인가 싶지만 땅을 고르고, 매매하고, 능력있는 설계, 건축업자들과 인부들을 고용해 집을 짓는 것 또한 엄청난 시간과 돈, 무엇보다 노력이 드는 과정임은 분명하다. 결국 이 곳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면 그것이 우리의 최종적인 선택이 되지 않을까 싶긴 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