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갑을관계 따지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요새 한국에서 진상민원인을 상대하는 한국 공무원의 고충을 인터넷에서 종종 접하게 되는데 그럴 때면 내가 살고 있는 이 곳에서 마주하는 현실과 정반대인듯 하다.
한국은 정부 시스템과 행정절차 중 많은 부분이 전자화되어있어 컴퓨터를 사용가능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손쉽게 정부에서 발급하는 증명서를 스스로 신청해서 발급받을 수 있다. 때문에 관공서에 방문하는 일이 최소로 한으로 줄어들 뿐더러 이런 사소한 일로 관공서를 방문할 때 특별히 복장을 신경쓰거나 공무원분들과 필요 이상의 긴 대화를 나눌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 곳은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와 한국의 관공서 방문 및 공무원에 대한 인식이 매우 다르다는건 결혼 후 싱가폴에서 처음 각자의 나라 대사관에 혼인신고를 하러 갈 때였다. 나는 항상 입는 반바지에 티셔츠, 캡모자를 쓰고 운동화를 신은 후 주 싱가포르 한국 대사관에 갔다오겠노라 남편에게 인사를 했는데 남편이 화들짝 놀라며 "어떻게 대사관에 그렇게 하고 가? 긴 바지에 긴 팔 입고 좀 더 갖춰입고 가야하는거 아니야?"라고 물었다. 더운 나라에서 긴 팔에 긴 바지라니. 서류만 잘 갖춰 제출한다면 내가 반팔을 입었든 반바지를 입었든 대사관에서 일하고 계신 분은 내 혼인신고서류를 잘 처리해주실텐데 복장이 무슨 상관이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겼었다.
그러고 얼마 후 남편이 인도네시아 대사관에 혼인신고를 하겠다며 나서는데 평소에는 덥다고 반팔 반바지만 입던 사람이 대단한 비즈니스 미팅이 있는 것처럼 말끔한 긴바지에 깃이 있는 셔츠까지 입고 머리까지 단장하고 가는게 아닌가. 그러곤 말했다. 인도네시아는 관공서에 이렇게 하고 간다고. 간단한 업무를 보더라도 공무원에게 최대한 공손하게. 공무원을 존중하고, 이 간단한 업무라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태도를 보여야한다고. 이 때도 나는 남편의 말을 완전하게는 이해하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우리가 인도네시아로 이주하기로 결정한 후 남편의 고향에 머물며 나의 체류 비자를 신청하기 위해 남편과 내가 함께 지역 이민국에 가야하는 아침. 계속되는 방랑생활에 최대한 가볍게 짐을 챙겼던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옷 중 최대한 단정한 긴 치마와 검은 티셔츠를 입고 방을 나섰는데 시어머니와 마침 방문 중이셨던 작은 이모부와 이모는 나를 보자마자 토끼 눈이 되어 "이렇게 입고 이민국에 간다고? 안돼!!"라고 소리치셨다. 결국 퇴짜맞은 옷 대신 시어머니의 옷장에 묵혀있던 깃이 누리끼리한 블라우스를 빌려입고 이민국으로 향할 수 밖에 없었고 남편은 이제야 이해했냐며 운전석에서 나에게 회심의 미소를 날렸다.
이민국에 가서도 남편은 우리보다 한참은 어려보이는 견습생 같아보이는 직원들에게도 연신 굽신거리며 우리가 이 곳에 오게된 사정을 설명했고 부재중이었던 책임공무원을 기다림 끝에 겨우 만나고도 그 날 다섯 번도 더 들었던 똑같은 설명과 질문을 모두 경청하며 똑같은 대답을 정성껏 했다. 이 곳은 특이하게도 공무원들에게 업무 시간이외에도 왓츠앱으로 연락을 할 수있도록 개인 왓츠앱 번호를 알려준다. 워낙 업무시간에 공적, 사적 이유로 자리를 수시로 비우는 그들이기에 그들이 자리에 있을 때 왓츠앱으로 잽싸게 연락하여 빠르게 움직여 알현해야 한다. 나에게 얼마나 급한 일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휴가이거나 기도를 하러 가야하는 시간이면 아쉬운 사람인 우리가 기다려야한다. 독촉이란 있을 수 없다. 그들의 기분이라도 나쁘게 했다가 서류 떼는 기간이 길어진다면 잃을 게 많은건 결국 우리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민국은 그나마 양호한 편이다. 들려오는 이야기로는 비자로 올리는 수익이 꽤나 쏠쏠해 이민국 공무원 처우는 꽤 좋은 편에 속하기도 하고 뇌물이나 최소한 수고비(?)는 지불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동사무소, 면사무소와 같이 작은 행정구역 관할 사무소는 더욱 가관이다. 사무실 안에서 흡연은 기본에 민원인을 앞에 두고도 담배연기를 뿜으며 옆 동료와의 잡담은 물론 기나긴 사적통화도 가능하다. 신분증 상 주소지 변경, 즉 우리나라로 치면 전입신고와 같은 간단한 절차에도 수고비는 필수이다. 필요한 서류가 어떤 것이 있는지 인터넷 상 자세히 나와있지 않아 사무소를 직접 방문해 필요서류를 물어보면 은근슬쩍 도움이 필요한지 물어보는데 여기서 말하는 그들의 도움은 최소한의 서류만 가져와주면 우리가 나머지는 알아서 해줄테니 수고비를 달라는 뜻이다. 우리가 불법적인 일을 요청하는 것도 아닌데 뒷돈이라니. 그냥 내 신분증 상 주소지만 옮기는데도 수고비를 낸다고? 그들이 이야기한 수고비는 한국 돈으로 4만원. 이 곳 현지 음식 한끼가 2천원 안팎인걸 고려하면 으레 수고비로 이야기하는 담배값을 훌쩍 넘어서는 참으로 비싼 수고비이다. 덕분에 우리는 다음 날로 전입신고서를 받아볼 수 있었다. 아니었다면 남편은 아직도 인터넷에서는 나오지 않는 서류를 붙들고 이미 수고비 지불을 거절당한 빈정상한 공무원과 씨름하고 있었을게 분명하다.
이런 돈은 요구하지도, 주지도 말아야한다는 것. 잘 안다. 김영란 법으로 더욱 이런 문제에 철저해진 우리나라에선 말도 안되는 상황이지만 이 곳에서는 일이 되게하려면, 그저 당연히 시스템 상 내가 받아야할 서류를 받는 것 뿐인데도 해당 공무원 휴가기간을 기다리고, 그가 자리에 복귀하는 시간에 후딱 맞춰 기다리다가 공무원이든, 그 공무원을 아는 사람에게든 수고비를 지불한 후에야 그 서류를 얻을 수 있다. 각종 서류 대행 에이전시를 거친다면 다르냐. 그건 결국 에이전시가 자신의 몫을 떼고 나머지를 자신이 아는 공무원에게 수고비로 지불한다는... 이러나저러나 공무원들은 앉아서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하며 수고비를 받는 그런 구조.
대학원 때 논문으로 그렇게 읽었던 개도국의 Street-level bureaucracy 를 10년이 지난 발리에서 몸소 체험하는 하루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