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 공항에서의 눈물의 이별을 뒤로하고 영국으로 가는 비행기에서도 내내 울던 나는 역시나 엄청나게
부은 눈으로 영국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다. 악명높은 이민국 심사를 지나 태국까지 들고갔던 거대한 이민가방을 찾아 수속을 마친 후 국제학생들을 위해 학교에서 준비해준 버스를 타고 학교가 위치한 브라이튼으로 향했다.
기차로 런던에서 한시간 정도 걸리는 남쪽 해변가 도시 브라이튼은 “영국에서 가장 성소수자가 많은 도시”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보수적이고 전통적이라 여겨지는 일반적인 영국의 이미지와 다른) 개방적인 도시였다. 특히나 내가 공부하던 분야는 일반적인 영미 유럽권 학생들과 더불어 개발도상국 학생들의 비율이 상당히 높은 분야였기 때문에 대학원 학생들의 국적이 UN 만큼 다양했다.
학교 캠퍼스 밖에 위치한 일반 주택에서의 거주를 선택했던 나는 학교 하우징 오피스에서 집 열쇠를 받아 택시를 타고 조용한 주택가에 있는 배정된 숙소로 향했다. 4개의 침실이 있는 전형적인 영국 주택이었는데 내게 배정된 방은 부엌 옆 가장 큰 방이었다. 나머지 3개의 방에는 모두 영국 남학생들이 일주일 새 하나 둘씩 입주해들어왔는데 이들과의 1년간 동거는 나에게 단시간 내에 가장 많은 문화충격을 안겨주기도 했다.
짐을 방으로 겨우 끌어다놓고 침대보나 이불도 없이 매트리스만 덩그러니 있는 침대에 앉아 있노라니 드디어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스리랑카 경유를 거쳐 런던으로, 브라이튼으로 혼자 이동하며 긴장했던 몸이 한순간 풀리며 그제서야 갑자기 샘솟는 그에 대한 그리움에 꺼이꺼이 한 시간을 울었던 것 같다.
태국에서의 시간 때문이었을까. 영국에서의 외로움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내가 영국에 도착한 이후 하루도 빼지않고 꼬박꼬박 영상통화나 음성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태국에서 만나기 전 내가 한국에 있을 때 메세지나 이메일로만 연락하던 것보단 훨씬 더 연인(?)스러워졌달까.
영국과 싱가폴은 8시간 시차가 났기에 우리의 통화는 주로 내가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오후 4시, 싱가폴에서 그가 잠들 무렵의 밤 12시였다.
회사를 그만두고 시작한 1년이 넘는 인도네시아 여행이 마무리 될 무렵 싱가폴로 돌아온 그는 다시 회사생활을 시작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내가 영국에 있을 무렵 그는 회사에 재취업하는 대신 자신의 일을 찾으려 하고 있었다.
같은 집에 살던 개미연구가 주 연구 주제였던 영국인 남자 박사대학원생은 한 달에 두어번씩 여자친구가 놀러와 주말을 지내고 갔는데 그렇게 여자친구가 놀러온 다음 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푸짐한 잉글리쉬 브랙퍼스트를 정성껏 만들어 방으로 가져가 여자친구와 함께 먹곤 했다. 이 모습을 볼 때마다 그가 그립다가도 영국에 한 번 오겠다 소리조차 없는 그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대학원에서 만난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 중에서 독일에서 온 동갑내기 남자 친구와 꽤 친해졌는데 말랑깽이 한국인인 나 쯤은 번쩍 들어서 자기 어깨에 앉힐 수 있을만큼 덩치가 좋았다. 서로 연애 상담도 하고 시시껄렁한 농담도 주고받으며 친하게 지냈는데 이 친구와의 관계는 아이러니하게도 후에 내가 그와 결혼해야겠다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외교관으로 일하다가 온 친구, 정부 부서, NGO에서 이미 경력을 쌓다가 공부에 갈증을 느껴 온 친구 등 다양한 나라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과의 교류에 더해 지적으로 엄청나게 뛰어난 교수님들의 강의를 듣다보면 작아지는 내 자신에 한숨이 푹푹 나올 때도 있었지만 그 때마다 수업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하는 그와의 소소한 전화통화는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렇게 첫 학기가 끝이나고 크리스마스와 연말 방학이 시작되었다.
영국에 있는 동안 저가항공의 혜택을 맘껏 누려봐야겠다는 생각에 방학에 어딜 가볼까 고민하던 중 나는 그에게 나의 오랜 꿈이었던 이탈리아에 가겠노라고 넌지시 말했다. 혹시나 "그래? 그럼 거기서 만나!" 하고 말해주길 나는 바랐는지 모르겠다. 아니, 당연히 바랐다. 대신 그는 눈치가 없는건지 그런 척하는건지 자신이 전에 여행갔을 때의 정보를 나열하며 피렌체의 맛집, 어느 박물관의 어느 작품이 좋았었는지, 로마에서는 어디를 꼭 가봐야하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홀로 피렌체 행 비행기에 올랐다.
처음 유럽 여행을 하게 된 나는 골목골목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도시를 거닐며 낭만에 푹 빠지다가도 쌀쌀해진 겨울 날씨에 홀로 옷을 열심히도 여몄다. 신혼여행지로도 각광받는 곳이어서인지 세계 전역에서 온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 신혼여행객들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30분 전 숙소에서 나오며 싱가폴에 있는 그와 통화를 해놓고도 숙소를 돌아 나오는 골목 바로 앞에 그가 영화처럼 서있길 기대하며 매 골목을 돌았다. 나중에 와서 안 이야기였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내가 간절하게 이탈리아에서 만났으면 했다는걸. 다만 일을 구하지 않은 상태에서 마냥 여행을 다닐 수만은 없었기에 내 마음을 알면서도 모른 척할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또 한 가지. 인도네시아 국적인 그는 한국인만큼 쉽게 유럽국가를 드나들기가 힘들었다. 갑자기 여행이 떠나고 싶어 전날 표를 예매하거나 공항에 가서 표를 사 바로 비행기를 탄다는건 일부 선진국 여권을 가진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이야기이다. 실제로 대학원에서 같이 공부했던 인도네시아 친구는 방학 때 프랑스를 가고싶어 여행을 계획했었지만 일단 비행기 왕복표를 구매한 후 이를 근거로 대사관에 비자를 신청해야했는데 연말이 다가오며 발급절차가 늦어져 계획했던 기간 내에 비자가 발급되지 않아 비행기표와 비자발급 비용, 숙소 예약비용까지 날리고 여행도 가지 못하게 된 경우도 있었다. 때문에 그와 유럽에서 서프라이즈로 재회하기란 애초에 거의 불가능한 시나리오였다. 그가 영국에 있는 나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우리 학교에서 발급해주는 학생 방문을 위한 일종의 신원보장 서류가 필요했는데 그의 비행편, 머무는 기간 등 세부사항을 내가 먼저 학교에 신고해야만 서류를 발급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복잡다단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한없이 화창하고 하늘이 푸르던 다음 해 7월 우리는 브라이튼에서 다시 만났다.